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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시라] 인공위성

팥_ 2016. 3. 12. 22:35



세미시라 합작에 참가한 글입니다.

http://lol.ncity.net/smsr/




  - 나 학교인데. 어디야?

  세미는 머뭇거리던 손가락을 움직여 라인을 보내고 휴대전화의 화면을 껐다. 대학생이 된 후 첫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세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 모교에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다지 만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게, 교제한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지만 어찌됐건 전 여자친구였다. 기껏해야 한 달이나 사귀었을까. 졸업식 날 고백을 받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도쿄로 가기 전 날 세미가 이별을 고했으니 아마 한 달도 채 사귀지 않았을 것이다. 사귀게 된 이유도, 헤어지게 된 이유도 간단했다. 세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2년 동안의 짝사랑도 접어야겠다고 결심했던 찰나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본래 세미는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 고백을 해왔을 때 거절하기 힘들다 해서 고백을 받아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은 무언가 이상했다. 졸업식 날이었기 때문인지, 끝내 시라부에게 고백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 날 따라 거절하는 게 힘들었는지, 제대로 된 이유는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냉큼 고백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세미는 분명히 그녀에게 말했다. 자신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그것에 그녀는 상관없다 대답했다. 그 사람한테 고백할 거 아니면 받아주세요. 그 문장이 세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기묘한 일탈 욕구 같은 걸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세미는 그 말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세미의 친구들은 다들 세미를 부러워했다. 세미는 잘 몰랐지만 그녀는 나름 2학년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아이라고 했다. 몰랐다는 세미의 말에 텐도는 혀를 내둘렀다. 한 우물을 파도 정도가 있지. 그 말에 세미는 얼굴을 붉혔다. 

  평범한 연애였다. 그녀는 세미가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매일 세미를 만나고 싶어 했다. 세미는 그녀의 부름에 모두 응해주었다. 이렇게 자주 만나다보면 자연스럽게 정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고백을 받아준 후로부터 약 2주 가량이 지났을 때, 세미는 제가 자기 자신을 잘 몰랐음을 인정했다. 2주 동안 늘은 건 후회와 죄책감뿐이었다. 아무리 알고 시작한 사이였어도 그녀가 손을 잡아올 때나 자신에게 애정이 넘치는 눈길을 보내올 때, 세미는 그녀에게 똑같은 마음을 돌려줄 수 없다는 데서 강한 죄책감을 느꼈다. 시라부에 대한 마음이 잠잠해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손을 잡아올 때 그 손이 시라부의 손이길 바랐고, 그녀의 머리를 내려다 볼 때면 좀 더 옅은 빛깔을 상상했다. 시라부의 대한 연정은 존재를 감추는 대신 그녀의 속으로 녹아들었다. 결국, 교복을 입고 등장한 그녀를 보며 여학생 교복 차림으로 문화제 여장 대회에 나갔던 시라부를 떠올렸을 때, 세미는 이별을 결심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세미는 어색하게 굴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제가 이런 곳에 소질이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 세미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그냥 얼굴 한 번만 보고 싶어서요.’ 들어줄 수밖에 없는 부탁이었다. 그냥 얼굴 한 번만 보고 싶어서. 세미도, 그래서 다시 시라토리자와에 왔다. 그리운 얼굴이 보고 싶어서. 

  “대학 생활은 어때요?”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아.”

  세미의 대답에 그녀는 살짝 웃었다. 걸을 때마다 그녀의 팔이 제 팔에 스쳤다. 그러나 팔짱을 껴오지는 않았다. 세미는 투정처럼 말을 이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즐거워서는 아니었다. 다만 이 어색한 분위기를 버틸 수가 없었다.

  “과제도 엄청 많고, 고등학교 때보다도 위계질서가 강하고, 술도 억지로 마,”

  줄줄이 불만들을 늘어놓던 세미는 어느 한 순간, 걸음을 뚝 멈췄다. 아. 세미는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뱉어냈다. 

  나는,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다시 이곳에 왔다. 

  시라부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세미를 보지 못한 건지 고개를 숙이고 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시라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세미는 그 찰나동안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인사를 건네면 좋을지, 표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손을 들어 인사할지, 혹은 들지 않을지. 세미 선배? 옆에서 그녀가 세미를 올려다보며 이름을 불렀지만 세미의 귀에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내려앉은 허공에서 마침내 시라부의 밀크티 색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세미는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시라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시라부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일부러 눈을 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세미는 입을 벌린 채로 가만히 시라부의 옆모습을, 그리고 뒷모습을 쫓았다. 본래 살가움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라지만 이렇게 대놓고 선배를 무시할 리는 없었기에 세미는 약간 당황한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럴만한 일은 없었다. 졸업식 이후로 시라부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따로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제가 시라부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만한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선배?”

  그녀가 또 한 번 세미를 부르고서야 세미는 변함없이 동그란 시라부의 뒷모습에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아냐, 미안.”

  세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할 수만 있다면 중학생 때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시라토리자와에 입학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고등학교를 선택한다면 그곳에선 좀 더 오랜 시간동안 코트 위에 설 수 있겠지. 짝사랑 때문에 이렇게 몇 년이고 가슴 졸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 몇 배는 더 나은 고등학교 시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시라토리자와가 아닌 학교를 선택할 수 있을까. 세미는 잠시 중학교 3학년 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현에서 가장 강한 학교로 간다. 그것에 얼마나 들떴던가. 시라부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됐던 순간의 기억 역시 자연스럽게 되살아난다. 그건 태어나 처음으로 겪은 기묘한 감정이었다. 정신없이 가슴이 쿵쾅거렸고, 어느 곳을 보아도 한 사람에게만 초점이 잡혔다. 하나하나 전부 소중하고 유일했던 순간들이었다.

  세미는 남몰래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활동 시간 역시 시라부가 세미를 피한 건 매한가지였다. 세미는 일부러 시라부의 옆으로 다가가기까지 했으나 그 때마다 시라부는 저 멀리 세미를 피해 다른 곳으로 향하기 일쑤였다. 

  “억지로 붙잡고 물어봤으면 되잖아?”

  텐도가 꼬치에 끼워진 고기를 이로 베어 물며 말했다. 세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곤 술잔을 비웠다.

  “보는 눈이 많은데 어떻게 그래. 감독님도 계시고, 후배 애들도 있고.”

  “그렇다고 그걸 그냥 보냈어?”

  “그럼 어쩌냐…… 네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아무리 걔가 원래 나한테 쌀쌀맞다지만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애는 아니잖냐.”

  텐도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으며 들고 있던 꼬치를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

  “뭐.”

  텐도가 내민 것은 제 휴대전화였다. 세미는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뜨고는 텐도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세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환하게 불이 들어온 액정을 바라보았다. 액정 위에는 번호 하나가 떠올라있었다. 

  “싫어.”

  세미는 인상을 찌푸리곤 재빠르게 텐도의 손을 밀어내었다.

  “궁금하다면서요, 에이타 군?”

  “……궁금한데, 알기는 싫어.”

  세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텐도는 세미의 말에 무례할 정도로 크게 혀를 찼다. 세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런 제 자신이 한심해보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느닷없이 미움을 받다니, 궁금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제가 미움살만한 짓을 했을까 싶어 두렵기도 했다. 세미는 다시 한 번 가득 채운 잔을 그대로 입으로 흘려보냈다. 무리하는 거 아냐? 텐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미는 고개를 저었다. 나 너보다 술 세거든. 그 말에 텐도는 입술을 씰룩이며 내려놓았던 꼬치를 다시 입에 물었다.



  “……왜 제가 데려가야 하는 건데요?”

  시라부는 인상을 찌푸리고 테이블 위에 엎어진 세미를 바라보았다. 텐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시라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보단 텐도 선배가 키도 크시고 체격도 좋으시면서. 왜 굳이 저를 부르셨어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 묻는 시라부의 날카로운 질문에 텐도는 장난스럽게 몸을 떠는 척하며 웃었다. 

  “응, 에이타 군이 켄지로한테 할 말이 많은 것 같아서.”

  “저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요.”

  “왜 이렇게 날카로워?”

  텐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시라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시라부는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더욱 더 구기며 텐도의 손을 피하려했으나 이미 손가락은 깊숙하게 들어와 옆구리를 찌른 후였다.

  “오늘 켄지로가 제대로 자기를 무시했다고 에이타 군이 잔뜩 속상해하던데 말야.”

  “……원래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닌데요.”

  “켄지로는 은근히 거짓말을 못하더라.”

  텐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시라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하나 더 자리 잡았다. 시라부는 텐도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복슬거리는 머리가 테이블 위에 제멋대로 엎어져있었다. 시라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아도 텐도가 데려가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함께 술을 마신 것도 텐도였고, 세미보다 키가 8cm나 더 큰 것도 텐도였으며, 세미의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는 것도 텐도였다. 애초에 시라부는 이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미성년자이기도 했고.

  “뭐가 그렇게 속상한지 말 좀 들어줘.”

  텐도의 말투는 여전히 가벼웠다. 시라부는 아랫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이 꼴인 사람한테 무슨 말을 들어요.”

  텐도는 웃으며 제법 소리가 크게 날 정도로 세미의 등을 내리쳤다. 하지만 세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텐도가 이상한 호들갑을 떨며 전화를 했던 순간부터 무시했어야 했다. 낮부터 자꾸만 머리를 맴돌던 ‘그 광경’만 아니었어도 가볍게 무시하고 잠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시라부는 텐도와의 통화가 끝난 후 휴대전화를 던져놓고 잠들기 위해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결국 몇 분 만에 벌떡 일어나고 말았지만.

  “조심해서 들어가―”

  텐도는 그렇게 말하며 세미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시라부에게 건네주었다. 시라부는 인상을 쓰고 텐도가 던지듯 건네준 세미를 간신히 받아냈다. 상상 이상으로 묵직한 무게에 시라부는 잠시 비틀거리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세미는 여전히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

  텐도가 급하게 달려와 세미의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시라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텐도를 살폈고 텐도는 콧노래를 부르며 세미의 지갑을 꺼냈다. 

  “고민 상담에 술주정까지 들어줬으니 이 정도는 내야지.”

  텐도는 지갑에서 세미의 카드를 빼내며 시라부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라부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텐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제일 원망스러운 건 역시 세미 에이타였다.



  “으음……”

  세미는 인상을 쓰고서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시야가 흐릿한 데다 어둡기까지 해 제대로 앞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자신을 부축해 옮기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텐도……”

  세미가 잔뜩 늘어지는 발음으로 텐도의 이름을 부르자, 일순간 저를 옮기는 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세미는 어떻게든 스스로 몸을 일으켜보려고 노력했지만 몸은 여전히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마냥 제멋대로였다. 

  “그냥 확 던지고 가버릴까.”

  그 때 세미의 귓가에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세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번쩍 일으키려다 그만 크게 휘청이고 말았다. 아, 좀! 짜증이 섞인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뻗어진 손이 힘겹게 세미의 팔을 붙잡았다. 세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

  “정신 들었어요? 그럼 혼자 걷지 그래요?”

  세미는 입까지 벌리고서 멍한 얼굴로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상태 보니 혼자 걸을 수 있겠네. 시라부는 혼잣말과 함께 세미를 붙잡고 있던 팔을 놓으려 했으나, 또 한 번 세미가 크게 균형을 잃은 탓에 결국 다시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겨와야만 했다.

  “왜 네가……”

  세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쉽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시라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세미를 좀 더 제게 가깝게 끌어당겼다. 그제야 세미는 제가 얼마나 시라부와 가까이 밀착해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숨소리도 제 것보다 더 크게 들려왔고, 샤워를 하고 나온 건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샴푸향도 온통 후각을 마비시켰다. 따뜻한 체온도, 부드러운 손도, 전부 온 몸을 훑어내고 있었다. 

  “좋다……”

  세미가 중얼거리며 시라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시라부는 급브레이크라도 걸린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세미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시는 거 아니죠?”

  시라부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발을 내딛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라부우……”

  세미는 말꼬리를 길게 끌며 시라부를 끌어안듯이 매달려 휘청대며 걸으려 노력했다. 시라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고 싶어서 왔더니 종일 무시나 하고……”

  세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별것도 아닌 일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여전히 정신은 흐릿했지만 그래도 시라부의 앞에서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는 마지막 이성 정도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자꾸만 눈물이 감은 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세미는 코를 훌쩍이며 눈을 꾹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루 종일 마주한 얼굴이라곤 좋아했던 적도 없는 옛 애인과, 배구부 후배들, 그리고 텐도 뿐이었다. 오늘 하루 보았던 시라부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해도 떠오르는 건 제게서 매몰차게 얼굴을 돌리던 시라부의 옆모습과 뒷모습들뿐이었다.

  “세미 선배.”

  시라부는 발걸음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세미를 불렀다. 그 목소리가 기폭제라도 된 것인지, 이윽고 세미가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운 건 시라부였다. 누가 울고 싶은 심정인데 지금. 오늘 학교에 오는 줄도 몰랐던 세미 에이타가, 분명 헤어졌다고 들었던 제 동급생과 함께 교정을 거닐고 있는 장면을 목격해버렸을 때의 기분이란 시라부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달도 채 사귀지 않고 헤어졌다길래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나보다 하고 나름대로 안도했더니만, 고향에 돌아온 줄도 몰랐던 사람이 옛 여자친구와 함께 모교의 교정을 걷고 있었다. 짜증과 함께 서러움이 솟구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세미는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시라부는 그대로 세미를 외면했다. 그녀와 함께 서있는 그의 인사를 받았다간 그 자리에서 눈물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이지 최악의 결말이었다. 

  “보고 싶었어.”

  너무, 많이.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찌푸리고 있는 얼굴도, 가끔씩 보여주던 미소도, 툴툴대던 목소리도, 그래도 결국엔 상냥하던 손길도. 눈가가 뜨겁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미는 가만히 시라부의 팔을 붙잡고 계속해서 그의 어깨에 눈물을 쏟아냈다. 시라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세미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시라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게 되는 게 두려웠다. 아까 전 텐도가 내민 휴대전화를 거절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걔랑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시라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 도쿄 가기 전에……”

  “왜 헤어졌어요?”

  시라부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지만 확고함을 품고 있었다. 세미는 또 한 번 두려워졌다. 어디까지 말해야할지, 어떻게 말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미 선배.”

  시라부는 그런 세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또 한 번 세미를 불렀다. 조금 전보다도 크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왜 헤어졌어요?”

  “……좋아한 적 없었어.”

  “……그럼 왜 사귀었는데요.”

  “네가 좋아서.”

  세미의 목소리는 불규칙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잔뜩 얼기설기 응어리가 져 처박혀있던 짓이겨진 감정이 드디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여기저기 헤지고, 모나고, 낡아빠져 볼품없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거대한 덩어리였다. 세미는 천천히, 거대한 덩어리가 남기고 간 잔여물들을 뱉어낼 준비를 했다.

  “네가 좋아서, 그래서 잊고 싶어서…… 그 애가 그랬어. 내가 다른 사람 좋아해도 괜찮다고……. 근데 네가 지워지기는커녕 더 짙어만 지더라. 그 애가 나한테 팔짱을 낄 때면 그게 네 팔이길 바랐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댈 때면 그게 네 머리이기를 바랐어.”

  시작부터 헤어질 수밖에 없던 관계였지. 세미가 중얼거렸다. 세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진득한 술기운이 붙어있어 어눌한 발음으로 문장을 더듬더듬 뱉어냈지만 그 말들에 담긴 마음만은 전부 진심이었다. 항상 하고 싶었던 말들. 텐도에게조차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괴로워했던 감정들. 

  “오늘은 왜 만났어요?”

  “……그냥 그 애가 얼굴 한 번만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한 거, 맞아요?”

  시라부의 물음에 세미는 그의 어깨에 대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근데 나한테 말도 안하고 왜 걔부터 만나요.”

  “……먼저 만나야 다른 약속 핑계로 금방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지.”

  “…….”

  시라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누구 때문에 이 마음고생을 했는데. 세미가 아예 자신에게 마음이 없어 보였다면 시라부 역시 진즉에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분명 세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데도 세미는 언제나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영원히 주변을 맴돌기만 할 사람처럼 굴었다. 그게 어쩐지 괘씸하게 느껴져 시라부 역시 굳이 세미에게 다가가려 들지 않았다. 물론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적어도, 자신은 마음에도 없는 여학생의 고백을 받아주진 않았다. 세미가 그 아이와 사귄다는 소문이 퍼졌던 날 시라부는 바위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을 향해 보냈던 보이지 않는 열렬한 시선들은 전부 거짓이었나 싶었다. 모든 게 자신의 착각 속에서 일어난 일인가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열병처럼 앓았는데, 이제와 한다는 말이 그게 전부 다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이라 고백한다. 

  “바보.”

  시라부가 입술을 짓누르며 내뱉었다. 시라부의 칼날이 박힌 말에 세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이.”

  세미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신.”

  다소 강도가 높아진 욕설에 세미는 잠깐 고갯짓을 멈추었다가, 곧 전처럼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찰나의 틈에 시라부는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술 먹고 고백하는 거 진짜 짜증나는 거 알죠.”

  “…….”

  “내가 당신 옮겨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주정이나 부리고.”

  “주정이 아니라,”

  “주정이에요.”

  시라부의 말에 세미가 급하게 끼어들었지만 시라부는 단호하게 세미의 말을 잘랐다. 세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훌쩍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시라부는 자신을 꼭 붙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살 연상의 남자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흡사 강아지와 같은 복슬복슬한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술 깨고 다시 해요.”

  “…….”

  “그러면 주정이 아니라 고백으로 받아줄 테니까.”

  여전히 시라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세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라부의 손은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세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세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라부의 반대쪽 손이 느리게 세미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내 손을 잡는 손이 네 손이기를 바랐고, 내 품에 닿는 살결이 네 것이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모두 너였다. 세미는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제 손바닥에 맞닿아오는 시라부의 손을 세게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