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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시라] 2월의 로맨스

팥_ 2016. 2. 20. 00:00







  세미는 당황한 얼굴로 우뚝 멈춰 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연인을 위해 사온, 잘 포장된 수제초콜릿은 봉투째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야, 너……”

  “마음에 안 드나 봐요?”

  세미가 손을 들어 시라부를 가리키며 채 말을 잇지 못하자, 시라부는 뚱한 얼굴로 돌아서려 했다. 정확히는 이미 돌아섰지만 세미가 급하게 신발을 벗어던지고 집 안으로 들어와 시라부의 손목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뭐야…… 너, 어? 오늘 뭐 잘못 먹었어?”

  “역시 마음에 안 드시는 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예뻐서 그렇지. 세미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발렌타인데이에 회의가 잡혀 ―그것도 주말인데! 세미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수제초콜릿 전문점에 들러 몇 주 전부터 미리 예약해놓은 초콜릿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더니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제 연인이 ―등을 맞으면 좀 아프다.― 모교의 여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다. 시라부의 몸에 무리 없이 딱 맞는 교복은 그래도 여학생 교복이라는 건지 치마길이만큼은 제법 아슬아슬했다. 

  “다른 커플들은 기념일이라고 맛있는 것도 먹고, 분위기도 내는데 저는 ‘혼자’, ‘집에서’, ‘세미 선배도 없고’, 심심해서 말이죠. 슬슬 옷장 정리 좀 할까 싶어서 꺼내보다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옛날 문화제 때 입었던 옷이 있더라고요.”

  무서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단어를 끊어 말하는 시라부 덕분에 세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시라부의 눈치를 살폈다. 문화제…… 아. 세미는 움츠렸던 몸을 다시 펴고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은 곧 함박웃음으로 물들었고, 시라부의 얼굴은 그와 반대로 점점 일그러져갔다.

  “무슨 상상해요?”

  “그야 고등학생 때 생각하지. 그 날 너 진짜 예뻤, 아!”

  세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라부는 손을 들어 세미의 등을 내려쳤다. 배구를 그만 둔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매서운 손이었다. 보통 문화제의 여장 대회는 아주 예쁘거나, 아주 괴랄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우승하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우승자는 후자의 경우가 많았다. 그야 당연했다. 이미 성인에 가까운 몸을 지닌 남자 고등학생이 여장을 해서 예쁘다는 찬사를 듣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라부는 무려, 심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우승을 했었다. 당장이라도 장내를 엎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과 삐딱한 자세, 불손한 태도와 성의 없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외모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 날 이후로 약 십 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시라부의 얼굴은 그 때와 변한 게 거의 없었다. 조금 젖살이 빠지고, 언제나 날카로웠던 인상이 약간은 순해졌다는 것 정도일까. 물론 그래도 험악한 표정을 지을 때면 저절로 존댓말이 나올 만큼 무서운 얼굴이지만.

  “아무튼, 이제 벗을 거예요.”

  “기껏 입어놓고 벌써?”

  “네. 애초에 계속 입고 있을 생각도 없었는데요. 저기다 내던진 내 선물이나 얼른 가서 주워 오시죠.”

  냉랭한 시라부의 말에 세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시라부의 고집을 이길 자신도 없었고. 

  “세미 선배.”

  “엉?”

  허리를 숙여 떨어뜨린 봉투를 주워 든 세미는 뒤에서 저를 부르는 시라부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또 한 번 초콜릿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스타킹 벗겨줄래요?”

  어느새 소파에 앉은 시라부는 한 쪽 다리는 무릎을 접어 세워 가슴께에 붙이고, 반대쪽 다리는 쭉 뻗은 채로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이미 충분히 아슬아슬했던 치마가 들려 올라가 훤히 허벅지 안쪽을 드러내게 되어 세미는 토마토처럼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야, 너, 진짜……”

  처음부터 다 계획에 있던 거구만. 저 잔망스러운 연인을 어찌하면 좋을까. 세미는 차마 말도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싫어요?”

  시라부는 그런 세미를 보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세미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시라부를 향해 걸어가 소파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흐음. 위에서 시라부가 작은 콧소리를 냈다. 세미는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시야에 가득 들어온 시라부의 하얀 허벅지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 자극적이잖아!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한 집에 산지도 꽤 되었으니, 시라부의 알몸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몸을 섞은 횟수야 당연히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런 식의 자극은 또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했다. 태어나서 여자 스타킹을 벗겨본 일이 한 번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물론 시라부와 교제하기 전 이야기이다.― 설마 시라부가 신은 스타킹을 벗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세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서 슬며시 손을 뻗었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뻗으려니 어디서부터 스타킹이 시작하는지 알 수가 없어 몇 번이나 스타킹 위를 공연히 더듬자 위에서 시라부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지 마.”

  “그냥 고개를 들면 되잖아요, 고등학생처럼 왜 그래요? 며칠 전에는 내가 싫다고 해도 허벅지 붙잡고 죽어라 벌렸으면서.”

  “너는 막상 할 때는 부끄러워하면서 이럴 때만 아주 부끄러움이라곤 조금도 없지?”

  “아니 사실이잖아요? 허벅지 좀 보는 거 가지고.”

  세미가 시라부에게 투덜대기 위해 고개를 들자, 시라부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장난스러운 얼굴로 치마의 끝을 잡고 살짝 들어올렸다. 

  “야!”

  “빨리 벗기기나 해요, 이러다 밤 새겠네.”

  세미가 더욱 붉어진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자 시라부는 다시 한 번 발끝을 까딱거리며 세미를 독촉했다. 하……. 세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곤 이번엔 곁눈질로 시라부의 다리를 힐끗거리며 조심스럽게 스타킹 위로 손을 올렸다. 스타킹에 눌려 살짝 튀어나온 허벅지 살이 그렇게 선정적인 광경인 줄 세미는 서른이 다 된 나이에서야 처음으로 깨달았다. 옛날, 고등학생 시절 어째서 제 친구들이 그렇게 ‘절대영역’을 외쳐댔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세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스타킹과 허벅지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살살 끌어내렸다. 허벅지 위로 남은 붉은 스타킹 자국마저도 선정적이었다. 

  “이거 맛있다. 어디 거예요?”

  뜬금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세미가 고개를 들어보니, 시라부가 제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어느새 세미가 가져온 초콜릿을 까서 우물거리고 있었다. 

  “너는 내가 주기도 전에 먹냐?”

  “어차피 나 주려고 가져온 거잖아요. 어디 거냐니까요?”

  “진짜 분위기 없게…… 우리 회사 근처에 개인 쇼콜라티에가 하는 작은 초콜릿 전문점인데 맛있다고 유명하다길래 몇 주 전에 예약해뒀지. 입에 맞아?”

  “응, 맛있네.”

  시라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쁘게 포장된 작은 초콜릿을 하나 꺼내어 포장지를 벗겼다. 그리고는 세미의 입가로 손을 뻗었다. 

  “이거 먹고 열심히 벗겨요.”

  제 입가로 다가오는 손에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더니만 입에 쏙 들어오는 초콜릿과 함께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저거였다. 치마부터 벗기면 안 될까? 이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돌아올 반응이 어떨지 뻔히 알기에 세미는 간신히 말을 삼켜내었다. 세미는 조심스럽게 스타킹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무릎을 넘기자 헐거워진 쉽게 아래로 딸려 내려왔다. 시라부의 피부는 원래부터 하얀 편이었지만, 다리를 덮고 있던 검은 스타킹이 벗겨지면 벗겨질수록 점점 더 속살이 드러나는 것이 안 그래도 흰 다리를 더욱 희어보이게 했다. 마침내 발목이 드러났을 때 세미는 당장에라도 발목을 붙잡고 들어 올려 도드라진 복숭아뼈부터 허벅지 안쪽까지 입을 맞추고, 손끝으로 쓸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눌렀다. 세미는 한숨을 쉬며 끝까지 스타킹을 벗겨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라부는 손에 묻은 초콜릿을 혀로 핥아내고 있었다.

  “이쪽도.”

  그리고는 구부리고 있던 반대쪽 다리를 펴 냉큼 세미에게로 뻗었다. 

  “……이게 진짜.”

  “빨리요.”

  발끝을 까딱이며 손가락을 핥아내는 모습이 그렇게 얄밉고도 ……색정적일 수가 없었다. 네에, 네에, 합니다, 해요. 세미는 투덜대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번에는 두 다리 모두 뻗은 채라 그런지 치마가 얌전히 허벅지를 덮고 있어 조금 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것만 같았다. 치마가 덮인, 살짝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손을 가져가는 행위는 상상 이상으로 선정적인 것이었다. 미치겠네. 세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마저도 손이 들어가기는 충분치 않은 틈이었다. 세미는 입술을 꾹 깨물고 느리게 치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손등과 손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에 충분히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 더욱 뜨거워졌다. 

  “흐으,”

  그 때, 시라부의 입에서 흘러나온 작은 소리에 세미는 전기가 나간 기계처럼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손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시라부는 살짝 다리를 오므렸다. 그 덕에 더욱 밀착해오는 허벅지에 더 이상 세미는 이성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미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시라부를 올려다보았다. 시라부 역시 조금 전 제가 낸 소리가 민망했는지 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래도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볼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세미는 빈 손으로 머리를 벅벅 흐트러뜨리곤 시라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괜히 노려보듯 쳐다보던 시라부가 세미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곁눈질로 세미를 돌아보았다. 

  “……진짜 미치게 하네.”

  “……뭐가요.”

  시라부는 눈동자를 굴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요.”

  세미는 대답과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댄 채로 몸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시라부의 머리를 감쌌다. 다소 거칠고 급한 몸짓에 시라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세미를 바라보았지만, 이미 세미의 입술이 시라부의 입술을 덮은 후였다. 조금 전 초콜릿을 먹어서 그런지 입 안 가득 진하고 달콤한 초콜릿 향기가 퍼졌다. 세미는 마치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시라부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놓았다 하기를 반복하며 시라부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미처 눈을 감지도 못한 시라부는 당황스러운 눈동자로 열심히 키스에 몰두하는 세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고등학생 때보다 많이 성숙해진 얼굴이었다. 몸에 풍기는 향도, 약간 까슬하게 닿아오는 수염도, 능숙해진 입맞춤도 전부 그랬다. 옷장 정리를 하다 우연히 교복을 발견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텐도를 통해 빌려온 ―어쩐지 텐도라면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했더니 하루도 안 되어 답이 돌아왔다.― 것이었다. 태연한 척 입고 있었지만 실은 몇 번이고 고민했었다. 평소 세미는 이런 성적인 이벤트를 원하는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혹여나 이런 짓을 벌였다 냉랭한 반응을 얻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미는 오히려 ‘진작 좀 해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물론 난데없이 현관에서부터 입을 맞추며 침대에 저를 밀치고 올라탔던 전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조금 더 느낌이 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를 갈구하고 있다는 느낌. 제 연인이 온몸으로 자신을 외치고 원하는 느낌, 그건 생각보다 더 달콤하고 황홀했다. 

  “흐, 아, 으응……”

  맞물린 입술 사이로 시라부의 신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세미가 마치 허벅지에 한이라도 맺힌 사람처럼 벗기지 않은 스타킹 위의 허벅지 살을 계속해서 쓸어내리고 주무른 탓이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빨아들이고, 여린 입 안 구석구석을 혀로 헤집는 움직임과는 다르게 손끝을 세워 조심스럽게 허벅지를 쓰다듬던 처음과는 어느새 많이 상반된 손길이었다. 단단한 손바닥이 계속해서 제 허벅지를 주무르고, 점점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행위는 절로 아찔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시라부는 세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제 쪽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세미는 연신 허벅지를 문지르던 손을 멈추더니 곧 조금 전보다도 더 급한 손놀림으로 거칠게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시라부는 세미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고 어깨를 쥐며 힘을 주어 세미를 밀어냈다. 당연하게도 세미는 절대 밀리지 않았으나 ―온통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시라부의 손길을 눈치 채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시라부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말아 쥐고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미의 어깨를 때리자 그제야 세미가 눈을 뜨고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시라부를 짓누를 듯이 무겁기만 하던 몸에서 서서히 힘이 풀리나 싶더니 겨우 세미가 슬그머니 입술을 떼어냈다.

  “왜, 숨 막혀?”

  시라부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야 그랬겠지만 이제는 겨우 이 정도쯤으로 숨이 차는 일은 없었다. 세미는 여전히 열에 달뜬 눈으로 시라부를 쳐다보았다. 그의 가슴이 급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시라부는 나른한 눈을 하고서 뻗었던 다리를 다시 구부려 세워 제 가슴께에 붙였다.

  “아직 이 쪽,”

  그리고는 발끝을 세워 살짝 부풀어 오른 세미의 다리 사이로 가져가 툭, 툭, 건드리다가 느리게 쓸어내렸다. 세미는 호흡하는 것마저도 멈춘 듯 더 이상 가슴이 들썩이지도 않았다. 

  “안 벗기셨는데요.”

  동시에 시라부는 양쪽 다리 모두를 뻗어 세미의 허리에 감으며 넥타이를 잡아 제 쪽으로 세미를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시라부의 입술이 먼저 세미의 입술을 덮었다. 세미의 손이 다급하게 시라부의 허벅지를 긁는 것이 느껴졌다. 스타킹을 벗기는 건지, 허벅지를 할퀴는 건지. 시라부는 그렇게 생각하며 좀 더 힘을 주어 세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시라부.”

  집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들은 제각기 흩어져 거실을 굴러다녔고, 시라부의 스타킹은 한 쪽은 둥글게 말려서 카펫 위에, 한 쪽은 소파 위에 던져져있었다. 단정하게 맸던 교복의 리본도, 역시 제대로 목에 걸려있던 세미의 넥타이도 전부 한낱 천 쪼가리가 되어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왜요.”

  뒤에서 시라부를 끌어안고 연신 어깨에 입을 맞추던 세미의 목소리에 시라부가 퉁명스럽게 ―그러나 세미는 시라부가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대답했다.

  “근데 너는 초콜릿 없어?”

  분명 돌아올 대답은 ‘내가 이 짓까지 했는데 초콜릿을 바랍니까? 염치도 없지.’와 같이 쌀쌀맞은 대답이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발렌타인 데이인데…… 하는 아쉬운 마음에 슬쩍 꺼내본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시라부는 답이 없었다. 곧장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시라부우, 응? 세미는 답지 않게 말미를 늘리곤 시라부의 목덜미에 부러 소리를 내가며 쪽쪽 입을 맞췄다. 

  “……어요.”

  “응? 뭐라고?”

  시라부의 작은 웅얼거림에 세미는 입술을 떼고 어깨 너머로 목을 쭉 빼어 시라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시라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세미의 시선을 피하려했다. 세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세워 시라부의 옆구리를 살짝 간질였다. 덕분에 시라부는 크게 몸을 비틀며 반사적으로 세미를 쳐다보고 말았다. 시라부는 몇 번 입술을 깨물었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가 하기를 반복한 후에야 겨우 작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쓰레기통에 있다고요.”

  시라부의 말에 세미는 잠시 동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부엌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학생 교복을 입은 시라부 덕분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부엌은 꼭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광경이었다. 싱크대 안에는 각종 냄비며, 볼이며, 조리기구들이 엉망진창으로 쌓여있었고 조리대 위에는 군데군데 녹은 초콜릿으로 보이는 것들이 흩뿌려져있었다. 하, 하…… 세미는 작게 웃음을 내뱉다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급기야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웃어대는 세미의 행동에 시라부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저를 안고 있는 세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재빨리 더 강한 힘으로 시라부를 끌어안는 세미의 행동에 결국 시라부는 연인의 품을 벗어나지 못했다.

  “진짜 귀엽다.”

  “…….”

  “귀여워 죽겠어.”

  귓가에 닿아오는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가 한없이 달콤하고, 한없이 간지러웠다. 시라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미에게 제 얼굴은 보이지 않겠지만, 빨갛게 물든 귀는 보일 거란 생각을 하니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해.”

  “…….”

  “사랑해, 켄지로.”

  시라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넌 대답, 아!”

  “……해요.”

  동시에 명치에 가해진 고통에 세미는 하던 말을 채 뱉지 못하고 비명으로 말을 맺었다. 그 비명 속에 작은 목소리가 스며든 것도 같았지만, 세미는 명치를 문지르며 가만히 시라부를 끌어안았다. 아무튼 부끄럼 많은 녀석. 한 번 더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세미는 꾹 참기로 했다. 제대로 듣지 못했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미는 시라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곧, 느리게 시라부가 몸을 돌려 세미를 마주 안아왔다. 나른하고 보송보송한 시라부의 체향은 언제 맡아도 기분 좋은 것이었다. 세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랑해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슬그머니 귓가를 두드렸다. 세미는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가, 그대로 와락 시라부를 끌어안았다. 시라부는 가만히 손을 뻗어 평소보다 더욱 복슬복슬해진 세미의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아, 좋아 죽겠다 정말. 시라부의 어깨 위로 얼굴을 묻은 탓에 잔뜩 뭉개진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따뜻한 2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