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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Q/공큐] 이유

팥_ 2015. 11. 30. 01:11




  제임스 본드는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았다. 최근에 이사했어요? 머니페니가 그렇게 물었던 것이 떠올라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렇게 물어볼 만도 한 모양새였다. 가구라고는 최소한의 살림살이가 전부인 데다가 박스에 담긴 짐들은 거실에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지저분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지저분하기만 했다면 최근에 이사했느냐는 느낌을 주진 못했을 것이다. 흔히 사람 사는 집이라면 필수로 느껴질 법한 주인의 체취나 흔적 같은 게 본드의 플랫에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신다 벗어 놓은 양말이나 아무렇게나 걸어 놓은 겉옷조차 없다는 말이었다. 

  본드는 단 한 번도 이곳을 집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본드가 집이라 불렀던 공간은 스카이폴, 그곳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전전했던 곳들은 모두 괜찮은 곳들이었지만 본드는 어쩐지 그곳들을 쉽게 집이라 부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머무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본드는 항상 은연중에 떠날 것을 생각했다. 그는 어디든 쉽게 마음 붙이지 못하는 남자였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에도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맺었으며 조금 깊어진다 생각할 무렵엔 이번엔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부터 떠올렸다. 베스퍼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이번에는 정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결국 그렇게 떠났다. 그 후로 본드는 언제나 마지막을 생각했다. 살고 있는 플랫에도 절대로 짐을 많이 두지 않았다. 모든 물건들을 버려두고 훌쩍 떠나도 괜찮을 정도로만 짐을 두었다.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그리고 그건 본드에게 있어 아주 오랜 습관이었다. 삼십 년도 더 된,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순간부터 지녀온 습관이었다.


  “이번에는 웬일로 멀쩡하게 가져오셨네요, 더블 오 세븐.”

  Q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본드가 건네준 무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내 쿼터마스터에게 바치는 선물이랄까.”

  “선물이 아니라 당연히 지켜야 하는 일이겠죠. 우리 부서 예산이 죄다 더블 오 세븐 때문에 박살나고 있는 건 알아요? 제발 무기를 사용할 땐 내 게 아니라 빌려온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잔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본드는 Q의 말을 끊으며 허리를 낮추어 Q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했다. Q의 얼굴엔 ‘지금 잔소리라고 했어요?’ 하고 되묻고 싶다는 표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고, 실제로도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본드는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오늘도 야근이야?”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얘기하는 본드의 목소리에 Q는 괜히 긴장이 되어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저렇게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건지, 어린애는 어린애구나 싶어 본드는 웃으며 Q의 손목을 살짝 쥐었다. 그러자 이리저리 바쁘게 고개를 돌리며 다른 요원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Q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본드를 바라보았다. 본드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서 이제는 Q의 손목을 느릿하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더블 오 세븐이 제대로 무기를 반납한 덕분에 야근 할 일은 없겠네요.”

  Q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본드의 새파란 눈동자를 피해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Q의 얼굴은 어느새 조금 붉게 물들어있었다. 본드는 조금 더 몸을 가까이 하며 뾰족하다 싶을 정도로 불룩 튀어나온 Q의 손목뼈를 더욱 적나라하게 쓸어내렸다. Q는 이러다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굴이 붉어져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지만 본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럼 퇴근하고 집으로 가지.”

  “……당신 집이요?”

  “내 플랫에 언제 너 데려가는 거 봤어?”

  “가뜩이나 좁은 집이 뭐 좋다고……”

  Q는 작게 꿍얼댔지만 본드의 말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본드 역시 쉽게 그것을 알아차렸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Q의 손목을 웃으며 놓아주었다. 

  “퇴근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Q의 귓가에 속삭인 본드는 순식간에 Q의 귓가에 짧게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켰다. Q는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본드가 몸을 일으킬 때 까지도 멍한 얼굴로 본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본드가 웃으며 손을 까딱이고 뒤돌아 나갈 때야 Q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씰룩대다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차마 고함으로 내지르지 못한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집. 본드는 랩실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입에 담아보는 단어였다. 오랜 습관 끝에 다시금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그 단어는 자신의 공간을 지칭하는 곳이 아니었다. 연인이 사는 곳, 그의 흔적이, 그의 체취가 전부 묻어있는 곳. 본드는 그곳을 집이라고 불렀다. Q의 플랫은 본드의 플랫과는 확연히 달랐다. 본드의 플랫엔 먼지 쌓인 상자들과 최소한의 가구, 한 달은 넘게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은 냉기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Q의 플랫은 달랐다. 본드의 플랫보다 더 작은 곳이었고, 절대로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가득 차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정리와는 거리가 먼 성격의 Q가 이리저리 던져 놓은 옷가지들과 Q가 키우는 고양이들이 어질러놓은 흔적들이 플랫 안에 가득했다. 매일 매일이 다른 곳이었다. Q는 야근으로 밤을 새는 한이 있어도 꼭 플랫에 들러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필요한 옷가지들을 챙겨 다시 나오곤 했다. 그래서 플랫엔 Q의 일상이 녹아있었다. 작은 플랫 곳곳에 Q가 가득했다. 플랫에만 들어서도 본드는 Q를 전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편안하고, 온기가 넘치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본드에게는 Q의 플랫이 집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오니 좋네.”

  본드는 Q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Q는 살짝 눈을 치켜뜨고 본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기 집처럼 말하기는.”

  “네 집이 곧 내 집이지.”

  “그럼 대출금은 당신이 갚아주는 건가요?”

  Q의 말에 본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없이 Q를 끌어안았다. Q는 순순히 끌려와 본드의 품에 안겼다. 익숙한 향기가 본드의 주변을 맴돌았다. 끝까지 갚아주겠다는 말은 안 하기는. Q가 투덜거렸다. 본드는 그런 Q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맨살에 닿아오는 맨살의 감촉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임무를 마치고 나면,”

  본드의 중얼거림이 Q의 머리 위에서 윙윙거렸다. Q는 본드의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건지,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한 건지 확신할 수가 없어 가만히 듣기만 했다.

  “늘 갈 곳이 없었어.”

  자신의 플랫은 들어갈 만한 곳이 못 되었다. 특히 임무 직후에는. 온갖 피비린내와 싸늘한 적의들 사이를 헤치고 살아 돌아온 살인 요원이 편히 몸을 누이기에는 너무나도 차가운 곳이었다. 본드는 그래서 임무를 마친 후에는 제 플랫을 찾는 대신 술집을 찾았고, 여자를 찾았고, 호텔을 찾았다.

  “이제는 갈 곳이 생겨서 좋네.”

  따뜻하고, 편히 몸을 누이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수 있는 곳. 

  Q는 가만히 본드의 말을 듣고 있는가 싶더니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허공에 들어 올려진 Q의 팔은 그대로 본드의 등에 느리게 둘러졌다. 뜨거우면서도 단단하고 거친 등에 비해 Q의 팔은 얇고 작았지만 이 순간 그 누구의 팔보다도 단단할 게 분명하다고 본드는 생각했다. Q는 무어라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고, 그 덕에 뜨거운 숨결이 본드의 가슴에 닿아왔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본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편이 좋았다. 본드는 Q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맨 살결에 곱슬머리가 살랑거렸다. 편안해졌다. 이곳을 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Q가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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