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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Q/공큐] 관계의 도약

팥_ 2015. 11. 24. 01:27





  ‘반지라도 맞출까?’

  Q는 언젠가 자신에게 물어왔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저는 그 물음에 뭐라고 대답했던가. 자신의 대답을 떠올리는 일은 본드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무슨 반지예요, 어린 애들처럼.’

  아마 저런 식으로 대답했던 것도 같았다. 다소 쌀쌀맞은 제 대답에 본드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딱히 Q를 조르지도 않았고, 투덜대지도 않았다. 그래서 Q는 그 사실을 쉽게 지워버렸다. 그가 반지를 맞추고 싶은 마음에 자신에게 물은 게 아니라, 어린 자신을 위해 그가 눈높이를 낮추어 생각해낸 질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만나기 전까진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는 사람이었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의 손가락에 반지 비슷한 것이 끼워져 있던 걸 본 기억은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제임스 본드는 반지 같은 걸 썩 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Q는 짐작했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 물어봐준 게 조금은 고마웠고, 또 Q역시도 반지는 일하는 데에 지장이 될 뿐이니 맞추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Q는 고마운 감정만 가슴 속에 품고 곧 본드가 자신에게 커플링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하필이면 지금 떠오를 게 뭐람. Q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바라보았다. 본드가 자신에게 주었던 반지였다. 당연하게도 커플링 같은 건 아니었고, ‘이것’에 대해 조사해달라며 건네주었던 물건이었다. 찰나였지만 Q는 본드가 자신의 손에 반지를 올려주던 감각을 기억했다. 그리고 조금 빨라지던 심장 박동을 기억했다. 이런 거에 설렐 정도로 제가 어린 사람이었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본드의 물음에 바로 긍정적인 대답을 주었을 텐데. Q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보았다. 반지는 조금 헐거워 제멋대로 손가락을 돌았다. 그의 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때 그가 끼고 있던 반지였다. Q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물품이 하필이면 반지이면서도 정작 그의 것은 아니라는 게 참 아이러니했다. Q는 한참동안 반지를 바라보았다. 이런 반지로 그를 추억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순순히 커플링이라도 맞출 걸 그랬다 싶었다. 

  Q는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제야 머릿속을 맴도는 진실이 머리를 뒤덮고 눈물샘을 죄어왔다. 본드는 진심으로 반지를 맞추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가 자유분방한 연애를 해왔던 건 그의 직업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직업이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반지는커녕 제대로 된 연인조차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는 연인에게 커플링을 맞추자는 제안을 해왔을 것이다. 본드는 적어도 Q를 추억할 만한 것이 많았다. 그가 지닌 것들은 설사 무기일지라도 전부 Q가 직접 만들어준 것들이었다. 하지만 Q는 달랐다. Q에게는 본드를 추억할만한 것들이 없었다. 기껏해야 그와 함께 했던 공간들, 시간들, 기억, 그런 것들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건 최소한으로 감추었다. 본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런 Q를 위해서 본드는 먼저 반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을 거였고, Q는 알지 못했다. 본드를 추억할 상황이 올 것이라고도, 그를 추억할 물건이 없을 것이라고도. 그가 얼마나 자신을 배려했던 건지 Q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서글퍼졌다. Q는 두 눈을 꾹 감고 주먹을 쥐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인 옷차림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오늘은 제임스 본드의 장례식이었다. 더블 오 요원들의 장례식이 보통 그렇듯, 시체는 없었다.


  비가 왔다. Q는 더욱 처연해졌다. 물론 런던은 비가 오지 않는 날을 꼽는 게 더 쉬운 도시였지만 오늘까지 비가 올 건 없지 않느냐고 Q는 하늘을 원망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들려오는 추도사가 눅눅한 공기를 더욱 눅눅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머니페니가 그를 쐈을 때 말이에요,”

  Q의 목소리에 옆자리의 머니페니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얼마 만에 살아 돌아왔다고 했죠?”

  MI6가 두 번째로 치르는 제임스 본드의 장례식이었다. Q는 나름대로 가볍게 질문했으나 머니페니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Q는 일부러 머니페니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때와 상황이 달라요, Q. 알잖아요.”

  머니페니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Q는 끝까지 머니페니를 돌아보지 않았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본드의 사망 소식을 M에게 전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스마트 블러드. 그건 너무나도 쉽게 본드의 사망을 알렸다. 계속해서 랩실 안에 울려 퍼지는 경고음을 들으며 Q는 기계를 끌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망연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어제만 해도 규칙적인 파형을 그리던 모니터 속의 선은 이제 끝없는 직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니터를 끈 것은 연락을 받고 달려온 M이었다. Q는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M을 바라보았다. M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Q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M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위험한 일들에 앞장서서 나라의 안전에 기여했던…… 추도사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져갔다. Q는 슬슬 한계라고 생각했다. 몸을 돌려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다. 머니페니가 Q를 바라보았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Q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가 땅에 부딪쳐 Q의 바지자락을 엉망으로 적셔왔다. Q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랐다. Q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반지는 손가락 위에서 헛돌고 있었다. 한참동안 반지를 내려다보던 Q는 마침내 목적지를 정했다. 그의 플랫, 그곳에서 다른 걸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겨우 이런 반지 말고 진짜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게 언제였더라. 본드의 플랫은 언제나 황량하고 썰렁했다. 그의 플랫에서 지내는 날보다 Q의 플랫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Q는 바닥에 이리저리 널린 짐들을 피해 발을 뻗었다. 플랫엔 미미하게 본드의 체향이 감돌고 있었다. Q는 손가락으로 코를 비비적거리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소파 앞 테이블엔 이리저리 서류들이 잔뜩 널려있었다. Q는 그 서류들 가운데서 반쯤 타버린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Q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쓰다듬었다.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인상이었지만 제임스 본드의 어린 시절 모습이라고 확언할 수 있었다. Q는 한참동안 사진을 바라보다 재킷 안주머니 안에 사진을 넣었다. 소중한 흔적이었다. 다른 건 또 없을까 싶어 Q는 어지러이 놓인 서류들을 대충 정리해가며 테이블 한 쪽 구석에 쌓아두었다. 그렇게 바닥이 드러난 테이블 위에 놓인 건 서류가 아니라 작은 상자였다. Q는 천천히 상자를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차마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상자는 누가 보더라도……

  “우리 쿼터마스터가 남의 플랫에 무단으로 침입해서는 물건들까지 뒤져보는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는데.”

  Q는 하마터면 손에 든 상자를 떨어뜨릴 뻔한 걸 겨우 붙잡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Q는 눈을 비비지도, 제 뺨을 꼬집어보지도 못했다. 그저 손에 든 상자를 쥐고 입을 벌린 채로 눈앞의 남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 장례식을 치룬 남자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본드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천천히 Q의 앞까지 걸어왔다. Q는 자신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닐까 싶어 수십 번 눈을 깜빡여봤지만 본드의 형체는 점점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는 Q의 눈꺼풀 위로 본드가 천천히 손을 얹었다. 어둠이 시야를 정복했다. Q는 가려진 눈 안에서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더블 오 세븐, 복귀를 보고합니다.”

  Q는 암흑 속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떨며 침을 삼켰다. 부활이 취미인 남자. 그게 그의 별명이었다. Q는 자신의 왼손이 그에 의해 들리더니 곧 약지에서 반지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꼈다. 제 손가락보다 더 큰 반지는 쉽게 손가락을 빠져나갔다. 

  “왜 이런 걸 끼고 다녀.”

  본드가 속삭였다. Q는 이제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어깨가 떨렸다. 본드는 자꾸만 떨리는 Q의 어깨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 힘을 주어 눌렀다. 강한 압박과 온기가 동시에 전해졌다. 모든 게 전부 생생했다. 눈을 가린 손의 감촉도, 귓가에 들리는 낮은 목소리도, 어깨를 잡은 손의 힘도. 전부 그였다. 

  “……죽은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Q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본드의 입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비슷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멋대로 나를 죽인 네가 나쁘지.”

  “장난치지 마세요. 내가 얼마나……!”

  Q는 억울한 듯한 목소리로 소리치려 했지만 곧 손가락에 닿아오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말을 멈추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헐거운 반지가 끼워져 있던 손이었다. Q는 살짝 손을 떨었다.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오는 차가운 기운이 낯설어 호흡이 힘들어졌다. 그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딱 제 손가락에 맞는 크기였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것 마냥 그렇게 Q의 손가락을 끌어안고 있었다.

  “갖고 싶으면 갖고 싶다고 말을 하지.”

  손가락 뿌리까지 들어온 금속의 촉감에 Q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Q의 눈을 덮은 손을 치우지 않은 본드 덕분에 Q는 여전히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Q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벙끗거렸지만 새어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Q의 손이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본드는 조심스럽게 주먹을 쥔 Q의 손에 제 손을 끼워 넣었다. Q는 단단하게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 본드의 손을 받아들였다. 딱딱하고 거친 손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부드러웠다. 

  “내가 이걸 얼마나 직접 끼워주고 싶었는데.”

  Q의 손이 본드의 손 안으로 완벽하게 잡혀 들어갔을 때, 본드가 속삭이며 Q의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걸 제지한 건 Q였다. Q는 본드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린 본드의 손을 붙잡았다. 본드는 손바닥이 뜨겁게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Q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습기에 젖은 먼지 냄새가 났다. 본드는 그게 죽음의 냄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플랫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그 죽음의 냄새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건 자신의 연인이었다. 본드는 제 손을 덮은 Q의 손 위로 조심스레 얼굴을 숙여 입을 맞췄다. 그러자 동시에 Q의 손이 본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닿은 피부는 평소보다도 거칠었다. 면도가 되지 않아 짧게 자라난 수염이 까실거렸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워요. Q가 흐느끼듯 속삭였다. 본드는 눈을 돌려 제 손안에 잡힌 Q의 손을 바라보았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생존’에 대한 감사 인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본드는 말없이 Q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이걸로 우리는 이제 겨우 출발선을 벗어난 관계가 되었다. 본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00Q_전력60분

주제 ; 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