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문장으로 첫 문장 / 끝 문장 연성하기
문장 : 또 다시 오늘을 버텨냈다. (열님 제공)
퍄님의 끝 문장 연성은 이쪽으로 → http://526119.tistory.com/73
* 센티넬버스 AU
또 다시 오늘을 버텨냈다.
카게야마는 멍한 눈으로 침대 옆에 놓인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59에서 00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다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도 참 길고 무의미한 하루였다. 카게야마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버텨냈다, 이 단어가 과연 맞는 단어일까. 버텨내고 싶지 않은 하루를 다시 버텨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고 가슴께의 옷을 그러쥐었다. 멀쩡하게 심장은 뛰고 있었다. 억울해. 카게야마는 그렇게 읊조리며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는 진작 죽을 목숨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말이다. 그는 가이드 중에서도 조금 유별난 가이드였다. 짝을 잃은 센티넬이 폭주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는 흔했지만 가이드의 경우는 달랐다. 센티넬과는 달리 가이드는 짝을 잃는다 해도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앞서 말한 대로 조금 유별난 가이드였다. 그는 최근에 발견된 돌연변이 가이드로, 짝을 잃으면 무기력증과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 죽어버리는 종류였다. 그러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죽은 후에 바로, 못해도 한 달 안에는 죽었어야 했다. 그것만 믿고 카게야마는 버텨 왔었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울적한 감정의 파도가 저를 몰아치고, 또 몰아쳐도 카게야마는 버틸 수 있었다. 어차피 저도 곧 죽을 테니까. 오이카와를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카게야마는 죽을 날을 절실하게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카게야마는 죽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돌연변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죽어야 하지만 죽지 않는 가이드.
의사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카게야마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다들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카게야마의 얼굴은 공허 그 자체였다. 이렇게 됐으니 이제 그만 다른 짝을 찾아 극복하고 살아가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을 버텨내다. 중의적 의미로 생각하면 저 문장도 틀린 문장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정말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중이었다.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
죽지 마.
오이카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피를 꿀렁꿀렁 뱉어내면서, 숨 한 번 쉬기도 힘들어하면서 기어코 카게야마의 옷자락 꽉 쥐고 뱉어낸 말. 저를 향해 겨누어진 수십, 수백 개의 총구들을 전부 무시하고서 카게야마 하나 만을 바라보며 뱉어낸 말. 제가 죽을 걸 알면서도, 제가 죽으면 카게야마 역시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뱉어낸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마지막 말을 위해서 죽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적어도 자살만은 하지 않겠다고 . 그래서 카게야마는 스스로 생명이 다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 꼴이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면서, 죽지도 못하는 몸. 처음엔 배신감과 분노가 차오르기도 했었다. 천장에 밧줄을 매어보기도 했고, 무섭게 날이 선 칼을 쥐어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결국 시도하지 못했다. 사랑하던 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를 따라간다 해봤자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카게야마는 결국 인간의 껍질을 쓰고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것은 어쩌면 당부나 부탁이 아닌 저주가 아니었을까. 카게야마는 가끔 그렇게 생각했다. 오이카와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미 죽은 영혼을 억지로 살아있는 껍데기 안에 우겨 넣고 살아가는 삶. 차라리 당신을 따라 죽어달라고 부탁하지 그랬어요.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가끔은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해.”
난데없이 들려온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안, 화났어? 오이카와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저를 바라보는 홍차색의 눈동자만은 진심이었고, 따스한 빛을 띠고 있었다.
“…누구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목에 채워진 폭발장치가 달린 목걸이와, 도청기가 달린 피어싱과, 그의 손목을 단단하게 묶고 있는 위치추적기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의 시선을 느꼈는지 머쓱하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테이블이 꽤 컸던 지라 팔은 조금 모자랐고, 카게야마는 저를 향해 뻗은 오이카와의 손을 향해 머리를 가까이 했다. 오이카와는 조금 전보다 즐거운 얼굴로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죽을까?”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오이카와의 손은 멈춰 있었다.
“나 죽는 거 엄청 쉬운데.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서 있는 대로 능력 써대고, 지나가는 사람 몇 명 붙잡아 죽이면 그대로―”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머리에서 손을 거둬 제 목으로 가져갔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게 생긴 철제 목걸이가 끔찍하게 오이카와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카게야마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펑―! 오이카와가 입을 벙끗거렸다. 카게야마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표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가만히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손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농담이야.”
농담이 아닌 걸 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잖아.”
오이카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이카와의 얼굴에선 어느새 웃음기가 전부 사라져있었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오이카와 씨 안 죽여요.”
카게야마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소중한 연구물이라서?”
“……네. 그거 다 그냥, 알잖아요, 협박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럼 차도에 뛰어들까?”
“그래봤자 차에 치인 것 정도로는 안 죽잖아요.”
“너무해, 토비오.”
누가 더 너무한 건지. 카게야마는 한숨을 쉬며 다시 젓가락을 들고 괜히 먹지도 않을 양상추 샐러드만 마구잡이로 헤집어댔다. 그 난폭한 움직임에 오이카와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치켜뜨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우물대던 카게야마는 결국 또 다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이카와 씨.”
“응?”
오이카와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양쪽 볼에 번갈아가며 바랍을 넣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간신히 작게 입을 열었다.
“……안 죽겠다고 한 이유가 나 때문이에요?”
오이카와의 따뜻한 눈동자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오이카와 씨가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홍차색 눈동자가 서서히 어둠으로 침몰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게야마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상관없어요.”
더 이상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가만히 테이블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도 별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
오이카와의 시선이 카게야마의 목덜미로 향하는 것을 느낀 카게야마는 괜히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보이지 않아도 손끝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이카와가 바라보는 그곳엔 흉측스러운 낙인이 새겨져있을 터였다. 특수 감찰 대상 가이드라는 낙인이. 이러나저러나 결국 저도 오이카와와 함께 감시받는 처지였다. 다만 오이카와의 경우 그 엄청난 살상 능력 때문에 더욱 지독하게 감시당할 뿐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머뭇거림 끝에 튀어나온 카게야마의 말에 그의 목덜미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오이카와의 시선이 카게야마의 얼굴로 옮겨갔다. 뭘? 오이카와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에서 어둠과 함께 반짝인 희망을 보았다. 역시 죽고 싶은 거면서, 왜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할까. 카게야마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따갑게 내리꽂히는 것을 느끼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당신을 살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은 곧,”
카게야마는 떨리는 손을 꼼지락거리다 주먹을 꾹 쥐었다.
“당신을 죽이는 유일한 존재라는 말도 되죠.”
방법은 간단했다. 오이카와는 결국 센티넬이었다. 센티넬은 가이드가 없으면 감정을 통솔하는 게 불가능해 폭주했고, 종국엔 자신의 능력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서 죽어버리곤 하는 그런 종이었다. 오이카와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은 카게야마가 유일했고, 고로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오이카와는 그렇게 제멋대로 엉켜가는 정신 속에서 본래의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미쳐 날뛰다 결국 그 몸마저 전원이 끊어지고 마는 신세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이카와에게도, 자신에게도 참으로 끔찍한 살인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몇 주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정신을 놓아갔다. 카게야마는 제 앞에서 미쳐가는 오이카와를 보면서도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제발 손 한 번만 잡아달라고 애원하는 오이카와를 보면서도 카게야마는 안 들리는 척 살아야했다.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제 손으로 오이카와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는 게 나았다. 적어도 그건 한 순간이었다. 딱 한 순간만 참으면 됐다. 눈앞에서 연인이 서서히 죽어가는 걸 보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이었다. 카게야마는 매일같이 울부짖는 오이카와를 보며 매일같이 죽어갔다. 연구원들은 계속해서 카게야마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카게야마는 그들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연구원들이 취한 최후의 수단은 특수부대를 이끌고 그들이 살고있는 곳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수단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연인의 정신이 완벽하게 붕괴되는 것을, 광기로 번뜩이는 눈을 하고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광경을, 제게로 날아오는 수십 개의 총알들을 전부 튕겨내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너져 내렸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마지막임을 직감했다. 오이카와의 몸 곳곳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피가 묻은 것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몸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총에 맞았을 리도 없었다. 오이카와의 몸은 총알 따위보다 강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오이카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멍하니 오이카와를 향해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겨갔다. 내가 바란 게 이거였나?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단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죽음을 바란 게 아니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의 평화였다. 이런 식으로 죽어갈 거였다면, 그랬다면, 나는, 차라리 당신을 영원히 내 옆에, 그들의 곁에 묶어놓고, 그렇게, 묶어놓고… 카게야마는 제 피인지, 남의 피인지 모를 피로 범벅이 되어 핏방울들을 흩날리며 날뛰고 있는 오이카와의 몇 걸음 뒤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 순간 오이카와가 손에 쥐고 있던 사람을 바닥에 떨어뜨리듯 놓아주곤 뒤를 돌아보았다. 카게야마는 그의 눈에 어린 붉은 광기를 보았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그저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정신을 놓은 와중에도,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그것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를 향해 걸어왔다. 오이카와는 한참동안 숨을 몰아쉬며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카게야마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과 이제 막 도착한 지원 병력들이 몇 겹으로 저와 그를 둘러싸고 총구를 겨누고 있는 걸 느끼면서도 카게야마는 온전히 오이카와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죽지 마.
일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목소리는 악몽처럼 생생하게 저를 따라붙었다. 카게야마는 가만히 오이카와의 이름이 새겨진 돌을 내려다보며 또 다시 그 목소리를 떠올렸다.
“덕분에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있어요.”
카게야마는 떨리는 손을 들어 비석을 만지작거렸다. 카게야마가 사정하고 또 사정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묘였다. 그의 존재조차 비밀이라며 유골을 연구소 지하에 보관하겠다는 것을 들은 카게야마는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며 연구실 바닥에 주저앉았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죽은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죽은 사람 편한 곳에 재워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결국 오이카와의 유골은 연구소 옆 공터에 매장하는 걸로 결정이 났고, 카게야마는 싸늘하게 웃으며 그 옆에 미리 제 자리까지 만들어놓는 게 좋을 거라 그들에게 답했다. 카게야마가 원한 것은 그들이 살던 집 옆에 묻는 것이었지만 그것까지는 용납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고,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이 연구소 옆에 오이카와를 묻는 것에 동의했다.
“내가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게 오이카와 씨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카게야마는 뜨겁게 젖은 숨을 내뱉었다.
“조금 억울하고, 힘들어도 계속 살아 볼게요.”
비석을 쥔 카게야마의 손이 하얗게 질려갔다. 카게야마의 몸이 천천히 떨려왔다. 죽지 마. 자꾸만 그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오이카와 씨가 내린 저주라면 달게 받아야죠, 어쩌겠어요.”
내가 당신을 죽였으니까.
비석을 쥐지 않은 다른 손에 들려 있던 국화 꽃다발이 하얀 꽃잎을 풀럭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슬픈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오이카와가 죽은 지 일 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