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이카게 교류회에 가져갔던 원고입니다.
* 카게야마 in 시라토리자와 설정.
* BGM 有
“들었어? 쿠니미랑 킨다이치가 입학하기로 했대.”
책상에 엎드려 휴대전화로 바쁘게 게임을 하던 오이카와는 제 옆에 앉으며 말한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는 딱히 오이카와를 바라보지 않고서 책가방을 뒤적거리며 교과서와 필통을 꺼내고 있었다.
“잘 됐네, 그 애들은 잘하니까. 바로 주전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야.”
오이카와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 죽었어!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썼다.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물론 그럴 만도 했다. 키타가와 제1 중학교에서 주전으로 활동했던 아이들은 대부분 아오바죠사이로 진학했고, 쿠니미와 킨다이치 역시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모두가 예상하던 바였다. 오이카와는 한숨을 쉬며 액정 위에 뜬 Retry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손끝은 액정 위에서 머뭇거릴 뿐 채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이와이즈미는 가방 속에서 눈을 떼고 오이카와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거절했어.”
“…당연히 그랬겠지.”
오이카와는 잠시 머뭇거리다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 역시 예상했던 바였다. 오이카와는 제가 보러 갔던 후배들의 경기를 떠올렸다. 카게야마가 자신의 동료들에게 처참하게 내쳐졌던 그 경기를. 애초에 코치진이 카게야마에게도 스카웃 제의를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으며 말렸었다. 자신의 토스, 신념, 배구 그 자체를 거부한 동료들이 아오바죠사이로 갈 것이 뻔한데 카게야마가 어떻게 감히 그들을 따라 여기로 올까. 오이카와는 그 날 보았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 뒷모습에는 혼란과 상처가 잔뜩 배어있었다. 저 녀석도 상처라는 걸 받을 수 있구나. 오이카와는 다른 생각보다도 그 생각을 먼저 했었다.
“우리 학교 말고도 스카웃 제의를 해온 학교가 있어서, 그 쪽으로 가기로 했다더라.”
이어진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어찌됐건 현 내에서 카게야마는 천재로 소문이 자자한 세터였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많은 학교에서 그를 원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카게야마와 비슷한 레벨의 스파이커도 없는 학교에서 어떻게 감히 ‘그’ 카게야마에게 먼저 손을 먼저 뻗을 수 있을까. 오이카와 자신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스트 세터 상을 받으며 현 내 최고의 세터로 인정받게 되었지만 정작 제의가 들어온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 한 곳은 당연하게도 아오바죠사이였고, 다른 한 곳은,
“시라토리자와?”
이와이즈미의 대답보다 오이카와의 물음이 빨랐다. 오이카와는 삐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물음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어조였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순식간에 기분이 상했다.
“두 독재자 데리고 잘 해보라지.”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5년 간 보아온 만큼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카게야마와 같은 세터와는 맞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에이스에게, 제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세터를 원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신뢰와 존경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복종이었다. 반면 카게야마는 어땠던가. 제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동료들에게 난폭하게 굴다가 결국 코트에서 쫓겨났었다. 그야말로 우시지마와 카게야마는 상극이었다. 둘 중 하나라도 그 성격을 굽히고 몸소 상대에게 맞춰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분명 삐걱대다 무너질 거야.”
오이카와의 입에서 심술궂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잔뜩 비틀린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우시지마라면 옛날 옛적부터 질색이었고, 카게야마와는 썩 좋은 사이도 아니었다. 아, 그런가. 껄끄러운 사람을 이제 하나도 아니고 둘을 동시에 상대해야 돼서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오이카와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대로 책상 위로 엎드렸다. 이와이즈미는 그런 오이카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냐?”
“내가? 왜?”
오이카와는 책상 위로 묻었던 얼굴을 반사적으로 돌려 이와이즈미를 쳐다보았다. 오이카와의 얼굴에 과장스러운 표정이 피어났다. 이와이즈미는 그 표정이 불만을 뜻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는 듯하더니 결국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와이즈미는 그러고도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좋게 생각해.”
“뭐를?”
오이카와가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이기고 싶어 하는 상대 1순위 2순위가 같은 팀이니 편하잖아.”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살짝 눈썹을 들썩일 뿐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진심으로 하려던 말은 저게 아니었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이와이즈미 또한 오이카와를 잘 알았기에 하려던 말을 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당연히 우리가 이길 거야.”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책상 위로 얼굴을 묻었다. 비록 카게야마가 아직 1학년이라지만 손수 모셔온 인물이니 연습경기에라도 선발로 내보낼 것이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카게야마는 그들의 팀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분명 트러블이 생기겠지. 팀은 사소한 것 하나에서부터 결정된다. 미미한 균열이 팀의 와해를 만든다. 그 와해를 막기 위해 가장 먼저 제거되는 것은 정갈하게 박힌 못들 사이에서 홀로 빼죽 튀어나온 못이다. 오이카와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경기를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상상했다. 상대 팀도, 같은 팀도 아닌 그 영역에서 중학교 3학년 시절을 떠올리며 우두커니 코트를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상상했다. 그렇게 하면 기분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은 것은 더욱 불쾌해진 감정의 찌꺼기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 후로는 카게야마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도 맞았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도 맞았고,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것도 맞았다. 딱히 소식을 들을 곳도 없었다. 어쩌다 가끔 킨다이치가 쿠니미에게 ‘카게야마 말이야,’ 하며 운을 떼는 것을 들은 것도 같았으나 오이카와는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자리를 피하곤 했다. 때때로 이와이즈미가 아무런 말없이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보기도 했지만 역시 오이카와는 웃으며 ‘왜 그렇게 봐, 이와쨩. 새삼스럽게 잘생겨 보여?’ 하고 넘길 뿐이었다. 이와이즈미가 제게 무언가 하려는 말이 있어 그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넘겼다. 오이카와가 저렇게 받아치면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쓰고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발길질을 하곤 했다. 그게 전부였다. 다른 말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터하이 예선이 코앞이었다.
공교롭게도 대진표는 아오바죠사이와 시라토리자와가 같은 경기장을 쓰도록 짜여 있었다.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만나겠네. 쿠니미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
“오이카와는?”
미조구치 코치가 물었다.
“…늘 그렇듯이요.”
야하바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미조구치가 이와이즈미를 향해 눈짓을 보내자 이와이즈미는 익숙한 듯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깥으로 향했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익숙해진 일이었다. 문을 열기도 전부터 여학생들의 간지러운 목소리가 잔뜩 들리는 듯했다.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 건지 오른손을 들어 브이를 만들어주고 있는 소꿉친구의 뒷모습이 곧장 시야에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이를 갈며 들고 온 배구공을 뒤로 높이 빼었다가, 힘을 주어 던지기 직전에 팔을 멈추었다. 멀쩡한 척 하는 줄 알았더니 정말로 멀쩡한 거였나. 여학생들에 둘러싸인 오이카와의 모습은 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카게야마가 시라토리자와로 갔다는 소식을 전한 날부터 쭉 오이카와의 걱정을 하느라 바빴건만, 저렇게 본인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평소처럼 여학생들 사이에서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열이 훅 끼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신경 쓰던 후배가 자신이 제일 껄끄러워 하는 고등학교로 갔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정작 오이카와 자신은 제가 기분 나쁠 게 뭐가 있냐고 주장하는 듯했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와이즈미에게는 우스울 정도로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긴,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 지도 모르지. 자기가 카게야마를 얼마나 신경 쓰는 지도 모르는 놈이니.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어깨를 힘껏 뒤로 젖혀 저 얄미운 뒤통수를 배구공으로 명중시키려 했다.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와이즈미가 높게 치켜들었던 공은 목표를 향해 날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바닥에 공이 튀는 소리만 점점이 들려왔다.
시라토리자와다, 시라토리자와야. 오이카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재잘대던 여학생들의 높은 목소리가 순식간에 수군거림으로 변했다. 여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서있던 이들이 모두 저들끼리 입을 모아 작은 목소리로 속닥대기 바빴다. 쟤, 카게야마 토비오 맞지?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자주색 트레이닝 복 무리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렸다. 이와이즈미는 동시에 오이카와의 뒤통수 역시 같은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키타이치 출신 천재 있잖아. 그 코트 위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애.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무리의 가장 앞, 우시지마의 옆에서 걷고 있던 익숙한 얼굴이 홱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반응하지 마라, 카게야마.”
위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매섭게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이와이즈미는 제 소꿉친구의 뒤통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안녕, 토비오쨩. 오랜만이네?”
오이카와는 어느새 저를 둘러싸고 있던 여학생들을 전부 돌려보내고서 시라토리자와 배구부를 향해 느리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빠르게 오이카와를 향했다. 카게야마는 얼굴 한 가득 대놓고 껄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슬쩍 몸을 뒤로 물렀다. 의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느릿하게 걸어간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와 카게야마의 앞에 멈춰 섰다. 이와이즈미는 제 짧은 머리를 거의 쥐어뜯다시피 몇 번 쓸어 넘기다가 오이카와의 옆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섰다. 왔어, 이와쨩?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숙여 어느새 오이카와의 발치까지 굴러온 배구공을 주워 이와이즈미에게 건네주었다.
“안녕하세요, 이와이즈미 선배.”
“딱히 할 말이 없다면 비켜라, 오이카와.”
카게야마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묘한 표정을 감추고 이와이즈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먼저 다른 부원들을 체육관 안으로 들여보낸 우시지마는 무뚝뚝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향해 말했다. 오이카와는 한 쪽 눈썹을 찌푸리며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딱히 너한테 볼 일 있는 거 아니거든, 우시와카쨩? 선배가 후배랑 오랜만에 대화 좀 나누겠다는데. 나는 토비오랑 얘기하고 싶은 거니까 너도 그냥 들어가지 그래?”
“별 비밀스러운 얘기하실 것도 아니잖아요.”
카게야마가 상냥하지 못한 목소리로 오이카와에게 말했다.
“너무하네, 토비오쨩. 아까 우시와카쨩 말은 그렇게 잘 듣더니? 오이카와 씨 정말 놀랐다구, 토비오쨩 주제에 순순히 다른 사람 말 듣고 말야. 명색이 왕이었는데 그래도 돼?”
오이카와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듯했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하나하나엔 날카로운 뼈가 박혀 있었다. 특히 그 마지막 문장에 카게야마는 흠칫 어깨를 움찔거렸다. 왜, 아까처럼 노려보지 않고. 오이카와는 마지막으로 튀어나오려던 삐딱한 말을 간신히 집어 삼켰다. 이와이즈미가 슬쩍 져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배배 꼬인 말을 뱉어내려는 건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울컥해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둘이서 쌍으로 저렇게 구는 걸. 오이카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이만 가지.”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끌었다. 카게야마는 떨떠름한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몇 걸음 끌려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 했다.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헛웃음을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주먹을 꾹 쥐었다. 왜 이렇게 찜찜하고 비틀린 기분이 드는 건지. 마치 카게야마가 시라토리자와로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 날과 같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시커먼 것이 마음을 쥐어흔들고 목구멍을 찔러대는 느낌. 목구멍 깊숙이 거대한 뱀이 파고들어 똬리를 트는 느낌. 오이카와는 목구멍 안에 손을 비집어 넣어 모든 걸 게워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아냈다.
“토비오.”
몇 걸음도 채 걸어가지 못한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또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엔 우시지마도 함께였다. 우시지마는 고개를 숙여 카게야마의 귓가에 무어라 중얼거리며 팔을 잡아끌었다.
“우시와카쨩은 토비오쨩의 아빠예요?”
그것은 틀림없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귓가에 가까이 하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중학교 때,”
우시지마는 무뚝뚝한 얼굴로 잠시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네가 카게야마를 많이 괴롭혔다고 들었는데.”
“풉,”
옆에서 이와이즈미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몸을 돌려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이와쨩!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우시지마 역시 잠시 말을 멈추고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가 이와이즈미가 웃음을 가라앉힌 듯하자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둘이 두면 또 괴롭힐 것 같았을 뿐이다. 안 그래도 첫 시합이라 생각이 많을 텐데 너 때문에 더 생각할 게 많아지면 곤란하니까.”
“아, 그래? 그것 참 눈물 나는 후배 사랑이네.”
목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던 거대한 뱀이 더욱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전신을 꿰뚫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을 가득 메우는 불쾌한 느낌에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같은 팀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는 척이야. 기껏 해야 두 달밖에 안됐으면서. 뒤틀린 마음이 더욱 기괴하게 틀어져갔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선배였었지만 나는 선배이니까.”
그 순간, 오이카와의 얼굴 표정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빨리 얘기하고 돌아와라, 카게야마. 바로 회의가 있을 거다.”
“아, 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팔을 놓아주고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를 스쳐 지나갔다. 오이카와의 옆에서 아주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흘끗 쳐다본 것도 같았지만 우시지마는 금세 멀리까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너도 빨리 들어와, 코치님한테 욕먹기 전에.”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오이카와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격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발을 떼었다. 오이카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가, 3초를 채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꼭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네.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숙이고 아무 것도 없는 보도블록만 바라보고 있었다.
“토비오.”
나지막한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겨우 오이카와의 눈을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내 눈치를 보고, 나를 피하고, 나를 껄끄러워 하는 걸까 너는.
“……네.”
카게야마는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 짧은 대답을 뱉어냈다.
“왜 시라토리자와로 갔어?”
“…….”
“아오바죠사이가 아니라?”
묻고 싶었다. 사실은 계속해서 궁금했다. 어째서 아오바죠사이가 아닌 시라토리자와로 갔는지 궁금했다. 그 답은 너무나도 쉽고 명확할 것이 뻔할 테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으로 직접 이유를 듣고 싶었다. 확인사살, 혹은 혹시 존재할지도 모르는 다른 이유를 위하여. 저조차도 카게야마가 당연히 아오바죠사이로 오지 않을 거라 확신했으면서 이제와 이유를 묻는 것이 참 우스웠지만 제가 추측하고 확신하는 것과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봤자 카게야마의 단순한 성격 상 결국 들려오는 답은 모두가 예상했던 답과 같을 테지만. 아오바죠사이엔 껄끄러운 동료들이 갈 것이고, 시라토리자와는 현 내 최고의 강호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이다.
카게야마는 언제나 강함을 꿈꾸었다.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서도 더욱 강해지기 위해, 최고가 되기 위해 그렇게 오이카와에게 서브를 알려 달라 졸랐고 항상 바쁘게 연습하고 또 노력했다. 카게야마는 점점 강해져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재능이 있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자신이 점점 강해질수록 오히려 갈증을 느꼈다. 배구는 팀 스포츠였고, 더욱이나 세터라는 포지션은 홀로 잘한다고 해서 팀 전체가 강해질 수 있는 포지션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그 갈증을 해결해 줄 강한 동료를 원했다. 제게 충분히 맞춰줄 수 있으며, 제가 보고 배울 수 있고, 결국은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줄 동료를 원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카게야마가 시라토리자와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결국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시라토리자와를 택했을 지도 모른다. 중학교 3학년, 그 일이 없었어도 말이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오이카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조용히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싸늘한 갈색 눈동자가 전부 카게야마를 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 카게야마를 담고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상당히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구네, 토비오.”
오이카와가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올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만은 여전히 싸늘한 기운을 담고 있었을 터였다.
이제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시라토리자와로 진학했다는 소식에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었는지, 왜 그렇게 찜찜하고 속이 울렁거렸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우시지마가 남기고 간 마지막 한 마디가 그 모든 것들을 깨닫게 만들었다. 너는 선배였었지만 나는 선배이니까. 억지로 당겨 올렸던 입꼬리마저 이제는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멋대로 나를 흘러간 과거 따위로 만들지 마.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뭐가 됐든 자신의 후배였다. 내 후배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오이카와가 얼마나 시라토리자와를 이기고 싶어 했는지 알면서, 얼마나 우시지마를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그곳에 갔다. 내 후배라 생각했던 이가 내가 그토록 꺾고 싶어 한 학교에 갔고, 그렇게 치를 떨었던 이와 같은 팀이 되었고, 이제는 네트 너머에 서서 그와 함께 나를 꺾으려 든다. 오이카와는 그런 상황에서조차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하며 기분을 다독일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역시 킨다이치랑 쿠니미쨩 때문이야?”
오이카와의 입에서 구체적인 이름들이 나오자 카게야마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짙은 남색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역시 그렇겠지. 오이카와는 맥 빠진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당연한 결과를 알면서도 물어본 제 잘못일까, 누구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카게야마의 잘못일까, 이런 결과가 나오도록 원인을 제공해준 두 아이들의 잘못일까. 카게야마는 이제 아까 전 잔뜩 깨물었던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오바죠사이로 가면 네 토스 받기를 그렇게 싫어했던 그 애들도 있고, 네가 지금 그렇게 눈치보고 있는 나도 있으니까?”
“……그, 게 아니라,”
카게야마가 드디어 머뭇거리던 입술을 살짝 열어 소리를 내었지만 오이카와는 이제 카게야마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카게야마가 채 말을 더 잇기도 전에 오이카와는 보란 듯이 빠르게 문장을 가로챘다.
“하지만 시라토리자와는 토비오쨩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강호교고, 네 천재적인 능력에 맞춰줄 천재 스파이커도 있으니,”
“당신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번에는,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말을 자르고 저들끼리 잔뜩 엉겨 덩어리가 진 목소리를 툭 뱉어냈다. 무거운 덩어리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질퍽한 잔해를 만들어냈다. 오이카와는 동시에 하던 말을 뚝 멈추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크게 숨을 마시고 내뱉으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초점을 잃은 갈색 눈동자로 멍하니 카게야마를 응시했다. 카게야마는 주먹을 꾹 쥐고 계속해서 크게 호흡을 골랐다. 서서히 카게야마의 호흡이 작아지고 느려져갔다. 그것과 함께 카게야마의 낯빛이 묘하게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카게야마의 얼굴에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것은 분명 후회, 혹은 그 비스무리한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치 도망치듯 주춤주춤 오이카와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말해선 안 될 것을 말해버린 듯한 사람의 얼굴로, 혹은 원망하는 얼굴로.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카게야마를 향해 급하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향해 허둥지둥 꾸벅 인사를 하고선 몸을 돌려 그대로 체육관을 향해 달려갔다. 오이카와는 멍한 얼굴로 점점 멀어져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질척하게 엉겨 덩어리가 져있던 목소리, 당신 때문이라던 말, 원망하던 표정, 말실수를 해버렸다고 후회하던 듯한 그 모든 행동들. 오이카와는 우두커니 서서 그 모든 것들을 되뇌었다.
더 이상 찜찜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당신 때문이에요. 사실상 최악의 말을 들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어째선지 방금 전까지 저를 괴롭히던 목구멍 속의 거대한 뱀이 말끔하게 사라진 느낌이었다. 어찌됐건 나는 네게 있어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흘러가버린 과거 따위는 아니었다. 그것이 오이카와를 흥분케 했다.
오이카와는 물병을 받아 들고 목을 축인 후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이제 고작 예선 2회전이었고, 상대 역시 어렵지 않은 상대였기에 많은 힘을 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력소모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며 뻐근해진 몸을 풀었다. 힘은 조금 들었지만 어쩐지 그만큼 기분이 상쾌했다. 정확히는 미약한 전류가 제 몸을 감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짜릿하면서도 흥분이 됐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한 모금 크게 물을 들이켰다.
“시라토리자와는요?”
오이카와의 물음에 이리하타 감독이 미조구치와 이야기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쿠니미에게 물병을 건네던 이와이즈미의 눈동자 역시 오이카와에게로 쏠렸다.
“안 그래도 아직 2회전 중이라길래 다 같이 보러가려던 참이었다.”
이리하타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파일을 미조구치에게 건넸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는 것을 잊었던 듯 ‘아,’ 하는 작은 감탄사와 함께 뒤이어 말을 덧붙였다.
“카게야마가 선발로 나왔다.”
그 말에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도, 킨다이치도, 쿠니미도, 제각기 하고 있던 행동을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와이즈미는 쿠니미에게 던지듯 수건을 넘기고 얼굴에 가득 인상을 쓰며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빨리 보러가야겠네요.”
오이카와는 웃으며 말하곤 텅 빈 물병을 1학년 후배에게 건넸다. 1학년 아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재빠르게 오이카와와 다른 상급생들의 물병을 수거하러 다니기 바빴다. 오이카와는 휘파람을 불며 유니폼 위에 져지를 걸쳐 입었다. 벽돌색 눈동자가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야.”
오이카와의 곁으로 다가와 따라 져지를 입던 이와이즈미가 짧게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이카와는 남은 팔 한쪽을 마저 꿰어 입으며 이와이즈미를 돌아보았다.
“괜찮은 거냐?”
“응? 뭐가?”
“……카게야마 말이야.”
이와이즈미는 괜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카게야마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온 이후로 오이카와의 얼굴이 전보다 좋아진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카게야마가 경기를 뛰는 모습을 직접 보기까진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물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카게야마가 경기에 나온다는 것은 곧 우시지마와 호흡을 맞춘다는 뜻이니 말이다.
“내가 언제는 안 괜찮았어? 빨리 가자, 이와쨩. 토비오랑 우시와카쨩이 호흡 안 맞아서 싸우는 것 정도는 이 두 눈으로 꼭 봐야지.”
오이카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얼굴이었다. 잠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금세 몸을 돌려 시라토리자와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코트로 이동하기 위해 모여 있던 부원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건 과연 멀쩡한 척 하는 얼굴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이와이즈미는 아까 전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평소처럼 굴다가도 우시지마와 카게야마의 등장에 바로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을 풍기던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십 년이 넘게 친구로 지냈지만 아직도 자신은 오이카와를 다 알 수가 없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고민거리나 껄끄러운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말을 하려 들질 않는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를 따라 발을 옮겼다. 카게야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부디 우시지마와의 호흡이 썩 좋지 않기를 바랐다.
오이카와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구부정한 자세로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압도적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미조구치의 작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미조구치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팔에 깊숙이 턱을 묻었다. 압도적이다. 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힘이었다. 시라토리자와의 상대 학교는 보는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시라토리자와의 힘, 테크닉, 전술, 그 전부에 말려들어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좌절과 절망, 그런 것들조차도 진작 사라진지 오래였다. 블로킹을 하기 위해 뛰는 점프의 높이가 점점 낮아졌고, 리시브를 하기 위해 달려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으며, 토스를 올려 달라 외치는 스파이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불쌍하다 정말. 경기를 구경하고 있던 여학생들이 중얼거렸다. 시라토리자와는 지금, 그야말로 작은 초식동물을 사냥하고 있는 거대한 맹수 무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엔 카게야마 토비오가 있었다.
오이카와는 지금의 시라토리자와가 제가 알던 예전의 시라토리자와와는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큰 차이점은 아니었다. 아마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확실히 달랐다. 예전의 시라토리자와는 여러 종류의 강력한 무기들이 내키는 대로 저들의 능력을 휘둘렀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순서가 잡혀있었다. 체계적인 순서와 함께 이 부분을 공격할 때는 이 무기를, 저 부분을 공격할 때는 저 무기를, 하는 점들도 잘 정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강력한 힘에 섬세한 조율이 더해졌을 때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코트의 중심에 서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약체 팀을 상대로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는다. 카게야마는 예전부터 쭉 그랬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선 아까의 흥분을 찾을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즐거운 듯 코트를 누비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오이카와는 알 수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오이카와가 그의 중학교 마지막 경기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라면 아마 킨다이치와 쿠니미가 그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을 터였다. 오이카와는 슬쩍 제 후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킨다이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고, 쿠니미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지만 미묘하게 입매가 뒤틀려있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눈동자를 돌렸다.
다툼도, 균열도 없었다. 완벽한 하나의 팀이었고, 카게야마는 그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거대한 함성이 코트를 울렸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투 어택. 비단 스파이커들 하나하나에게 맞추기만 하는 세터가 아니다. 토스를 올릴 때는 완벽하게 그들을 믿는다는 몸짓으로 올리면서도 공을 만지는 손길 하나하나엔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 자신만의 신념과 팀원에 대한 신뢰로 똘똘 뭉쳐진 공은 무섭도록 강력했다. 정확하게는 팀원에 대한 신뢰보다는 팀원의 능력에 대한 신뢰였고, 다시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카게야마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투 어택을 성공시킨 카게야마가 사뿐하게 코트 위로 발을 디뎠다. 카게야마의 주변으로 그보다 훨씬 큰 체구를 가진 선수들이 모여들어 한 번씩 카게야마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손을 마주 부딪치거나 하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우시지마는 그 무리에서도 가장 마지막이었다. 어린 맹수의 독단적인 공격에 과연 그 우두머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오이카와는 입술을 핥았다.
카게야마는 제 옆으로 다가온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혼이라도 날까 긴장하여 굳은 얼굴인지, 혹은 칭찬을 바라는 얼굴인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우시지마는 잠시 카게야마를 내려다보다가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우시지마가 들어 올린 손은 허공에서 잠깐 머뭇거리나 싶더니 곧 카게야마의 둥그런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오이카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어라 말을 하는 듯 입이 뻐끔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 소리까지는 들을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나쁜 말은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으니까. 우시지마는 나름대로 부드럽게 손을 움직여 카게야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우시지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카게야마의 젖은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우시지마가 저런 식으로 팀원을 칭찬하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적어도 오이카와가 아는 선에서는 처음이었다. 본래 시라토리자와의 세터는 카게야마보다 한 학년 위였는데,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이런 식으로 그를 대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오이카와는 어느 한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2학년 세터가 투 어택으로 점수를 얻었을 때의 기억이었다. 우시지마는 그에게 ‘잘했어.’라는 한 마디 칭찬과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단 내게 올리는 편이 더 현명했겠지. 상대가 조금만 더 눈치가 좋았더라면 바로 막혔을 거다.’라는 몇 배로 긴 충고를 했었다. 그러나 지금 카게야마에게는 어떻게 했던가. 오이카와는 한 쪽 눈썹을 찌푸렸다. 카게야마가 눈에 띄게 들뜬 얼굴로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흘러넘친 반짝이는 빛이 시라토리자와가 선 코트 위를 환히 메웠다.
오이카와는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우고 그대로 뒤로 몇 발자국을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이미 옆 자리에 앉아있던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팔짱을 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경기를 바라보는 카게야마를 상상했을 때 어째서 더욱 불쾌한 기분이 들었는지를. 오이카와는 배구할 때의 카게야마를 좋아했다. 벤치가 아니라 코트 위에 선 카게야마를 좋아했다. 그 위에 서서,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는 얼굴을 하고 공을 만지는 카게야마를 좋아했다. 힘없이 무너져 벤치에 앉은 뒷모습이 아니라, 코트 위에 선 그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빛을, 그 흥분을 좋아했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는 그의 배구를 보는 것에 온몸이 짜릿해졌다. 어린 능력이 무섭게 자라 제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데에 대한 긴장감이기도 했고, 그의 배구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기도 했다. 물론 아직까지 저를 넘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언젠간 저를 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분할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은 오이카와도 그저 배구를 좋아하는 덜 자란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멋진 실력에 대한 열망과 감탄과 시기는 늘 세트처럼 묶여 그를 따라다녔다.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카게야마를 따라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 묵직하게 올려져있던 왕관도, 아직 어린 몸에 어울리지 않게 뒤덮여있던 거대한 망토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누가 네게서 그걸 벗겨냈을까.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오이카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는 더 이상 어린 왕이 아니게 됐구나.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게야마의 몸에 붙어 잔상처럼 휘날리는 희미한 망토 자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환상이었고, 상상이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더 이상 펄럭이던 망토는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깔끔한 폼으로 뛰어올랐다. 카게야마의 손끝에 닿은 공이 조금 높고, 거칠고, 빠르게 떠올라 그대로 다른 이의 눈앞으로 향했다. 그곳엔 우시지마가 있었다. 카게야마의 것과 같이 붉고 거대한 망토를 휘날리며 뛰어오른 우시지마의 손에 맞은 공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상대편 코트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카게야마에게는 남의 옷처럼 거대하기만 했던 망토가 그에게는 맞춤옷처럼 딱 들어맞았다. 결국 우시지마를 제대로 된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이 카게야마였다는 걸까. 오이카와는 차갑게 식어 떨리는 손을 꾹 말아 쥐었다. 동시에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소리가 들렸다. 우시지마는 한쪽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가볍게 훔쳐내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쥐었다. 잘했어. 이번에는 그 입모양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붙는 다른 말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와이즈미와 감독, 코치, 후배들의 시선이 모두 오이카와에게로 쏠렸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슬슬 갈까요?”
그렇게 말한 오이카와는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쉬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에 느꼈던 짜릿함과 흥분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 발밑을 굴렀고, 그 빈 자리를 다시 한 번 검은 뱀이 메워 똬리를 틀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고 빠르게 발을 옮겼다.
수건을 받아 목에 걸친 카게야마가 우두커니 서서 찬 물로 입을 축이며 그의 뒷모습을 좇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오이카와는 체육관을 빠져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점점 멀어져가던 오이카와의 벽돌색 머리가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봐?”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장난스레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카게야마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강 말을 둘러대었다. 우시지마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매니저에게 수건을 받아 땀을 닦으며 그런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카게야마가 쳐다보고 있던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민트색 무리의 끝자락이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시지마가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 카게야마는 방금 경기에서 이긴 사람이라기엔 미묘하게 어두운 구석이 있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하면 좋은지 몰랐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전에 카게야마는 목에 두른 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얼굴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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