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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른] 조각글 모음 (141226~150308)
시라카게는 시라부 이름이 나오기 전에 적었던 글입니다.. 그래서 글에 이름이 없어요 ^^;
트위터, 트윗숏으로 짧게 적어내려간 단문들 백업입니다.
141226 자기, 자기 거리는 쿠로오가 보고 싶었다
"안녕, 자기. 나 보고 싶었어?"
나는 보고 싶었는데. 카게야마는 제 눈 앞에 나타난,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하고서 저보다 7cm쯤 더 큰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여자 아이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누구야? 대박, 진짜 잘생겼어. 야, 야, 사진 좀 찍어봐. 번호 달라고 해볼까? 그 수군거림들에 겨우 정신을 차린 카게야마가 남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와,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남자는 능청스럽게 대답했지만 카게야마는 남자의 말을 전부 무시하고 인파가 없는 곳으로 향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니까?"
잘 끌려오나 싶었던 남자는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제 손목을 잡은 카게야마의 손을 역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남자의 코앞까지 끌려와버린 카게야마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저와 남자를 구경하던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멈췄다. 뭐야, 게이야? 이런 수군거림을 들은 카게야마가 필사적으로 남자를 밀어내려 했으나 남자는 밀리기는 커녕 오히려 카게야마를 더 잡아당기더니 그대로 제 품에 가둬버리기까지 했다.
"애인이 보고 싶었다는데, 어? 도망갈 생각부터 해?"
남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카게야마에게만 들릴 정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랬다. 남자는 카게야마의 애인으로, 현재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하루에도 열 번씩 보고 싶다고 칭얼거리기 바쁜 쿠로오 테츠로였다. 시험기간이라고 연락이 뜸하나 싶더니만, 이렇게 말도 없이 대뜸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종강 했으면 종강 했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카게야마는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며 주먹을 말아쥐고 쿠로오의 옆구리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가격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카게야마가 빠른 속도로 말을 뱉었다.
"아아, 그래?"
쿠로오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카게야마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아마 저 목소리는 필히 뭔가 꿍꿍이를 감추고 있을 때 내던…
"사람들 없는 데서 만나고 싶단 말이지? 음흉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대체 어떻게 하면 말을 저렇게 알아들을 수 있는 거지? 카게야마가 반박하려는 찰나 쿠로오가 더 재빠르게 카게야마의 이마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적. 카게야마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품에 안았던 카게야마를 놓아주었다. 멍하니 몸에 힘을 풀고 있던 카게야마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자 쿠로오는 빠르게 카게야마의 손목을 붙잡고 이번엔 제가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 자기가 부끄러움이 많아서요, 사람들이 많아서 부끄럽다네요. 우리 자기랑 데이트 좀 하게 길 좀 터주시겠어요?"
…………아, 저 미친 인간을 어쩌면 좋지.
다음 날 카게야마는 저를 흘낏거리며 차마 말을 걸지 못하는 반 아이들에게 열심히 도쿄에서 놀러 온 사촌 형이 장난 친 거라며 수습에 수습을 하고 다녀야만 했다. 배구부원들의 안쓰럽다는 눈빛을 애써 외면한 채로.
150102 #멘션받은_커플링으로_낼맘은없는_동인지_한문단쓰기
"그런 위험한 물건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쿠로오는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손으로 받아내며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이끌고 제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카게야마를 향해 걸어갔다. 카게야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 번 다급하게 쿠로오를 조준했다.
"…가까이 오면 쏠 거예요."
"그래 그래 착하지, 그거 내려놔 카게야마. 위험해."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요?!"
카게야마는 소리를 지르며 또 다시 울컥 피를 뱉고 있는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정신없이 흔들렸다.
"나, 스파이예요."
카게야마는 여전히 쿠로오에게 총구를 겨눈 채로 한쪽 손을 들어 빠르게 눈가를 훔쳤다.
"당신은 경찰이고, 나는 당신이 그렇게 쥐잡듯이 찾던 스파이라고."
카게야마의 갈라진 목소리가 떨림을 고스란히 품고 뱉어졌다.
"알아."
쿠로오가 힘겹게 웃으며 대답했다. 카게야마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잠시 멈추었다.
"어쨌든 어린 애가 들고 있을 만한 물건은 아니니까."
쿠로오는 평소처럼 그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려 노력했지만 결국 드러난 것은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150102 #멘션받은_커플링으로_낼맘은없는_동인지_한문단쓰기
할 말이 있어요. 부활동이 끝난 후에도 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전부 다 카게야마의 저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 '할 말'이라는 것은 아마도 뻔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늘 물어오는 '우시지마 선배가 좋아하는 토스가 뭔가요?'라거나, '어떻게 하면 우시지마 선배에게 칭찬 받을 수 있나요?'라거나, '저도 선배처럼 되고 싶은데 어떻게 연습하면 좋을 지 모르겠어요.'라거나. 나는 예상되는 질문들을 곰곰이 속으로 되뇌이며 오늘따라 한참동안 우물쭈물하고 있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저, 선배."
"드디어 까먹었던 말이 생각이 났어?"
내 비꼬는 듯한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정말이지 전혀 내 범주 안에 없던 것이라 나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게야마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지금도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은 심정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쩌면 좋죠?"
그 카게야마가 연애 상담이라니. 나는 한참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해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입술을 괜히 벙끗거리며 카게야마의 검은 정수리를 내려다 보았다.
"……고백해야지 뭐 어쩌겠어."
한참 후에 답한 내 말에 카게야마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인지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절당한다 해도요? 상대가 저를 경멸한다 해도?"
카게야마는 다시 평소로 돌아온 듯 속사포처럼 내게 질문을 쏟아내었다. 다만 그 질문의 내용이 평소와 같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턱을 쓰다듬으며 더듬더듬 카게야마에게 대답했다.
"어…… 설마 고백 좀 했다고 경멸까지 하겠어? 거절당하면 속 시원히 잊을 수 있겠지. 잘 되면 좋은 거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형식적인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또한 연애에 그렇게 밝은 편이 아니었고, 카게야마의 그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판에 함부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줄 수도 없었다. 그저 저 카게야마가 '경멸'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 보니 보통내기가 아닌 성격의 여자애를 좋아하고 있나 보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가요. 카게야마는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 이제 가도 되는 걸까? 어쩐지 순식간에 불편해진 분위기에 나는 그렇게 묻고 빠르게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카게야마를 아우르고 있는 분위기가 나를 꼼짝없이 묶어놓고 있었다. 연애의 ㅇ에도 관심이 없을 것만 같던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속으로는 이런 순정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니. 나는 다시 생각해도 놀라운 상황에 입술을 잘근거리며 카게야마의 둥근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쨌든 내 하나뿐인 직속 후배인데 이 참에 신경 좀 써,
"…좋아해요."
주자…… 뭐?
"좋아해요, 선배."
카게야마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코트 위에서 바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나를 볼 때의 그것과 비슷한 시선이었다. 나는 멍하니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150102
1. 우카게
관계 중엔 그리도 넓어 보이던 그의 등은 이상하게도 사정 후엔 한없이 작아보였다. 나는 이불을 끌어올리고 누워 침대 끝에 걸터 앉아 말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카이 씨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등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잡힐듯 잡히지 않았다.
2. 히카게
히나타, 이제는 카게야마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 카게야마가 그 말을 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카게야마는 돌리려 했던 부실의 문 손잡이를 차마 돌리지 못했다. 으음, 요즘 들어 그렇지. 독립하려나? 카게야마의 손이 힘없이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3. 모니카게
우리 주장이 너를 좋아한대. 후타쿠치의 그 말로 주선된 자리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도무지 입을 열 것 같지 않은 모니와에 카게야마는 제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해야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모니와의 고개가 번개같이 들렸다.
"으응?!"
모니와의 대답에 카게야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모니와 씨가 좋습니다."
그리고 모니와는 숨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모니와 씨는 멋진 세터이고, 또 주장으로서 팀을 훌륭하게 다루는 모습이 좋았어요.“
그 말에 모니와의 표정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하더니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카게야마는 긴장한 얼굴로 괜히 물을 들이켰다.
4. 보쿠카게
카게야마가 인상을 쓰며 자꾸만 제 허벅지를 침범하는 보쿠토의 손목을 꾹 잡아 보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보쿠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얼굴로 휘파람을 불며 계속해서 카게야마의 반바지 안쪽을 더듬어댔다. 사람들 많은데 진짜! 카게야마가 다급하게 속삭였지만 보쿠토는 아예 귀를 틀어막은 듯했다. "둘이 사이 좋네?" 앞에 앉아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쿠로오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괜히 찔려 고개를 푹 숙이고 보쿠토의 손등을 힘껏 꼬집었다. 보쿠토가 억울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허벅지 좀 만지면 안돼? 보쿠토의 말에 카게야마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머리를 쿵, 박고 엎드렸다. 저 변태 새끼. 쿠로오가 혀를 차며, 그러나 어쩐지 재밌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5. 츠키카게
"이제 그만 좀 싸우자."
츠키시마는 제 머리를 베고 누워 잡지를 읽고 있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할 소린데."
카게야마는 잡지를 팔랑이며 대답했다. 모든 싸움의 시작은 너잖아. 츠키시마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았다. 화해한지 한 시간도 안돼서 또 싸우고 싶진 않았다.
"지금 무슨 말 하려다 참았지?"
카게야마가 얄밉게 물어왔다.
"아니."
츠키시마는 괜히 정색을 했다.
"아!"
카게야마가 인상을 쓰며 잡지를 내리고 찌푸린 얼굴로 츠키시마를 올려다보았다.
"너 지금 내 머리 만지는 손에 힘 엄청 준 거 알아?"
츠키시마는 자기도 모르게 힘을 주었나 싶어 뜨끔하며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닌데?“
"맞는데?"
카게야마가 투덜거렸다.
"아니라니까?"
츠키시마는 다시 대꾸하며 직감했다. 아, 2차전 발발.
6. 스가카게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가락을 유독 좋아했다. 손을 잡고 있을 때도 가만히 놔두질 못하고 끊임없이 손가락을 매만졌고, 침대 위에서는 더욱 더 집착하듯 손가락을 물고 빨기 바빴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그런 스가와라를 좋아했다. 붉은 혀를 내어 제 손가락의 끝을 간질이듯 핥고, 질척하게 뿌리부터 첨단까지 빨아들이는 스가와라의 모습을 침대에 누워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정신없이 손가락을 핥던 스가와라가 가끔씩 강렬한 눈빛으로 제 눈을 마주할 때면, 그야말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후는 보통 같았다. 스가와라는 웃으며 마주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더욱 야릇하게 손가락을 애무했고 카게야마는 그것에 보답하듯 우는 소리를 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7. 아카카게
아카아시는 한숨을 쉬었다. 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학교였다. 그저 교사인 친구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였고, 저는 친구의 부탁으로 전해줄 것이 있어 친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일에 엮인 건지. 아카아시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다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병원에 데려가 줄게."
제 어깨에나 올까 싶은, 대략 중학교 1학년으로 보이는 작은 아이가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엉망이 된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었다. 아이는 배구복처럼 보이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피, 그리고…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액체로 범벅이 된 유니폼을. 아카아시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창고에 들어왔을 때 한창 아이를 괴롭히고 있던 무리들은 이미 달아난지 오래였다. 아카아시는 대답할 힘도 없어 보이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아카아시의 품에 축 늘어져서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은 희미한 숨을 간신히 내쉬고 있었다.
150104 ①
나는 매사에 자신만만한 성격이었다. 연애, 사랑문제에 있어선 더욱 그랬다. 말솜씨가 좋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가면을 쓸 줄도 알았으며, 얼굴도 괜찮은 편이었기에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서 절망이란 것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카게야마 토비오 역시 금세 내 것이 되리라 자신했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누구인 지는 알 지 못했지만 같은 중학교의 선배였다던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상관 없었다. 여차하면 그 상대에게 위협을 가해서라도 차지하면 되는 거였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물론 최선의 방법은 카게야마의 마음을 내게로 돌리는 거였지만 그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카게야마와의 대화 하나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저, 후타쿠치 씨."
카게야마는 오렌지 주스를 빨아들이던 빨대를 입에서 떼어놓고 나를 불렀다. 나는 생글생글, 그 예의 친절하고 유한 웃음을 지으며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을 머뭇거렸다. 나는 슬슬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절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끝까지 카게야마를 기다려주었다. 카게야마는 입술 새로 작은 한숨을 뱉는가 싶더니 겨우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후타쿠치 씨는 모니와 씨와 친하죠?"
그리고 그 목소리가 뱉어낸 것은 카게야마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이름이었다. 나는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내던 손을 잠시 멈추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듯했지만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마저 잘라내어 입에 넣었다.
"당연하지. 주장한테 내가 얼마나 예쁨 받는데."
농담처럼 가벼운 말을 던져 보아도 카게야마의 초조함은 바뀔 기색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초조함에 전염이라도 된 듯 계속해서 케이크를 잘라 먹었고, 내가 케이크를 절반 넘게 먹어갈 때쯤 되어서야 카게야마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저 사실은,"
나는 카게야마를 쳐다보지 않았다.
"모니와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그치만 저는 전혀 모니와 씨와 친하지 않으니까… 후타쿠치 씨한테 어떻게 도움을 받,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좋아하는 이가 좋아하는 그 상대에게 어떤 짓을 해서라도 내 사람을 차지할 자신이 있었다. 그랬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니와 선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였다. 나는 그 사람 앞에선 한없이 무력하고, 또 무력했다.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고 아끼는 사람. 나는 새하얘진 머리의 한 구석에 모니와 선배를 떠올렸고, 또 다른 한 구석에 카게야마 토비오를 떠올렸다. 손이 떨려왔다.
나는 끝까지 카게야마 토비오를 쳐다보지 못하고 케이크에 포크를 꽂았다.
150104 ②
"아, 카라스노의 세터가 나한테 연락해왔어."
모니와 선배의 말에 나는 옷을 갈아입던 것을 우뚝 멈추었다. 카게야마에게 선배의 연락처를 알려준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나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마저 티셔츠를 꿰어 입고서 태연하게 라커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카게야마요?"
"응. 갑자기 만나달라고 해서 조금 놀랐는데 생각보다 귀엽더라구."
만났어?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라커의 문을 조금 세다 싶을 정도로 닫았다. 커다란 소리가 라커룸에 울려 뒤에서 옷을 갈아입던 다른 부원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만났는데요?"
"나도 세터니까 궁금한 점이 있었나봐.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그냥 같이 저녁 먹고 헤어졌어. 너만큼 다루기 힘들 줄 알았는데 엄청 착하고 싹싹하던데? 확실히 1학년은 다른가 봐."
모니와 선배는 웃으며 농담을 섞어 말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단 한 번도 내게 먼저 만나자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늘 먼저 연락하는 것은 나였고, 만나서 대화를 주도하는 것도 나였다. 카게야마가 먼저 대화를 주도했던 적은 딱 한 번 뿐이었다. 그 날. 모니와 선배를 좋아한다 말했던 그 날. 그런 카게야마가 모니와 선배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심지어 만나자고 까지 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꽤 큰 충격이었다. 모니와 선배는 카게야마와의 만남에 꽤 즐거웠던 듯했다. 나는 느리게 가방을 들어 메었다.
카게야마에게 모니와 선배의 연락처를 준 것을 후회했다. 한 편으로는 역시 나보다는 모니와 선배 쪽이 훨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고, 또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니 그 둘이 잘 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금세 그 생각을 취소했다.
그래도 역시 카게야마의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 할 지라도, 존경하는 이가 웃을 수 있다 할 지라도.
후타쿠치? 모니와 선배가 나를 불렀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자신이 치졸하다고 생각했다. 존경하는 사람을 시기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남자답게 당당하게 굴 것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지금처럼 선배의 부름을 무시하는 것 뿐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나는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라커룸의 문을 열고 나섰다.
휴대전화를 켰다. 당연하게도 카게야마의 연락은 없었다.
150104 ③
"모니와 선배."
상기된 얼굴로 연신 싱글벙글한 웃음과 함께 휴대전화를 두드리던 모니와 선배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최대한 초조함을 감추려 애썼지만 정신 사납게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은 멈출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평소처럼 굴자.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올렸지만 나는 곧 그 미소가 오히려 내 얼굴을 뻣뻣한 고깃덩어리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금새 표정을 없앴다.
"……카게야마한테 고백할 거예요?"
내 물음에 모니와 선배는 힉, 하는 소리를 내며 크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큰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바닥을 쳐다보았다. 모니와 선배의 휴대전화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액정에 떠오른 것은 카게야마의 메일이었다.
발신인 : 토비오
제목 : 저도
내용 : ....보고싶어요
읽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토비오. 그 발신인에 나도 모르게 아래 내용으로 눈이 돌아갔을 뿐이었다. 모니와 선배는 당황한 듯 허둥지둥 몸을 숙여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웠다. 그리고 머쓱한 듯 나를 쳐다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고백은 무슨…! 그런 사이 아냐, 후타쿠치."
"토비오라고 부르잖아요?"
"……그건 그냥,"
모니와 선배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별 수 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쑥쓰러운 듯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곧고 강한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는 괜히 고개를 숙이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좋아, 너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휴대전화를 두드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좋아하고 있어."
점심 먹었어? 카게야마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이 전송 되었음을 확인한 후에 나는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모니와 선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쑥쓰러운 듯 애써 입꼬리를 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에 숨겨진 행복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고백은… 고민 중이야. 아직 조금 이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꾹 쥐었다.
모니와 선배는, 내가 행복해지기를 바란 유일한 사람이었다. 저 사람의 얼굴에 언제나 웃음만 가득하기를 바랐다. 모니와 선배가 누군가로 인해 불행해진다면,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행복해하는 모니와 선배를 두고 괴로워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결국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나를 희생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모니와 선배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카게야마도 선배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 데요 뭐.' 이런 말도, '선배가 고백하지 않으면 카게야마가 먼저 할 기세던데요?' 이런 말도, '카게야마도 선배처럼 삽질하고 있을 게 뻔하다구요.' 이런 말도, 그 어떤 능청스러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꾹 쥐고 있을 뿐이었다.
150105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경기 직후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 넣으려던 손을 멈추고 제 이름이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에 다시 고개를 돌려 마저 동전을 집어 넣으려고 했지만 제 손목을 낚아챈 쪽이 좀 더 빨랐다.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삐딱하게 몸을 돌려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이를 올려다 보았다.
어제 내내 제게 연락을 해왔던 하시카미였다. 물론 카게야마는 쉼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쏟아지는 메일도 마찬가지였다. 답장은 커녕 읽지도 않은 채로 휴대전화를 꺼두었다. 카게야마는 서늘한 얼굴로 하시카미를 보았다. 하시카미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 깔았다.
"할 말 없으면 놓지."
카게야마의 말에 하시카미는 당황한 듯 카게야마의 손목을 더욱 세게 쥐며 순간적으로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방심하던 차에 갑자기 주어진 힘에 자기도 모르게 하시카미 쪽으로 끌려가 걸음을 옮겼다. 무슨 짓이야? 카게야마의 싸늘한 목소리에 하시카미는 손목을 쥔 손에 살짝 힘을 풀었다. 그러나 놓지는 않았다.
"……미안해."
고개를 푹 숙인 하시카미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는 하시카미의 그 짧은 말에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어 짜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움찔거렸다. 어제의 일이 또 생각난 것이었다. 텅 빈 코트에 떨어지던, 제가 토스를 올린 공이. 공을 외면하던 부원들의 얼굴이. 그 얼굴들에 섞여있던 하시카미의 얼굴이. 하시카미의 표정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던 부원들과는 다르게 하시카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안 할 게. 그냥… 사과하고 싶었어."
하시카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카게야마는 이제 서늘한 얼굴이 아닌, 그저 표정이 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공허였다. 하시카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카게야마의 손목을 세게 쥐었다. 그 감촉에 카게야마는 흘려보내던 정신을 잡은 건지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똑바로 하시카미를 바라보았다.
하시카미는,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줬던 사람이었다.
그저께까지는.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제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고 부리는 유치한 투정은 아니다. 그저 원래부터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버려진 것과 믿고 있던 사람에게 버려진 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였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됐어."
카게야마는 하시카미의 손에서 제 손목을 비틀어 빼내었다. 의외로 손은 쉽게 빠졌다. 힘이 빠진 하시카미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사과하지 마."
카게야마는 동전을 꾹 쥐며 몸을 돌렸다.
"다 끝났으니까."
결과는 바뀌지 않아. 작은 속삭임이 들린 것도 같았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하시카미는 멍하니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작고 어린 뒷모습이 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그토록 끌어 안고 싶어했던 뒷모습을 이런 식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마저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서서히 실감이 났다.
하시카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묻었다.
좋아해. 3년 내내 한 번도 말하지 못한 말을 되뇌며 그렇게 얼굴을 묻었다.
150105 멘탈 치유용 단문
"토비오, 뭐 해? 자?"
머그잔에 가득 진한 핫초코를 탄 오이카와가 마지막으로 커다란 마시멜로를 둥둥 띄우고서 카게야마가 홀로 있을 방으로 향했다. 어제 저 때문에 몸을 혹사시킨 것도 있으니 아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었건만 의외로 카게야마는 깨어있었다. 오이카와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머그컵 위로 호호 입김을 불며 카게야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하마터면 그대로 머그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토비오쨩, 책 읽는 거야?"
카게야마 토비오가 책을 읽어? 오이카와는 머그컵을 고쳐 쥐고 떨리는 눈동자를 간신히 카게야마에게로 돌리며 걸어갔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물음에 슬쩍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일찍 일어난 오이카와가 엉망이 된 카게야마의 옷가지들을 전부 세탁기에 넣었기에 제 옷을 찾지 못한 건지 카게야마는 속옷에 오이카와의 티셔츠 하나 만을 걸친 차림으로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반칙이잖아, 저거.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게야마에게로 향했다.
"네가 배구 잡지 말고 책을 읽기도 해?"
진심어린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반박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막상 입을 열고 보니 또 반박할 말이 없어 카게야마는 다시 입을 다물고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 선배가 좋아하는 책이라면서요."
카게야마의 작은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숙여 카게야마가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확인했다. 그 언젠가 제가 카게야마에게 흘리듯 말했던 책이었다. 오이카와는 협탁에 머그잔을 내려놓고서 카게야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좀,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오이카와는 더욱 세게 카게야마를 끌어안을 뿐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카게야마가 몸에서 힘을 빼고는 저를 끌어안은 오이카와의 어깨에 턱을 괴자 그제서야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놓아주었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카게야마의 뒤로 가 이번에는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더 이상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몸을 뒤로 해 오이카와의 품에 제 등을 기댈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감싸 안고 그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무거워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오이카와를 내치지는 않았다.
"좋아해요."
"……네?"
오이카와의 중얼거림에 카게야마가 흠칫 몸을 떨더니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반쯤 뜬 눈으로 책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카게야마에게로 돌렸다. 곧 오이카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 번졌다.
"책 읽은 건데?"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이카와의 긴 손가락이 어느 한 문장을 짚고 있었다. 좋아해요. 확실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왜, 설렜어?"
오이카와가 키득키득 웃으며 카게야마의 볼에 제 볼을 부볐다. 카게야마는 조금 강하게 오이카와를 밀어냈으나 역시 오이카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존댓말 쓰길래 놀란 건데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삐딱함에 오이카와는 웃으며 카게야마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몇 번 몸을 틀었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좋아해."
책을 넘기려던 카게야마의 손이 채 다 넘기지 못하고 공중에서 멈췄다. 오이카와의 낮은 목소리가 카게야마의 귓가를 윙윙 울렸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진짠데."
오이카와가 속삭이듯 말을 덧붙였다. 카게야마의 손가락에서 얇은 종잇장이 차마 넘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귀 끝까지 붉어진 카게야마의 옆모습을 보며 핫초코만큼 뜨거워진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카게야마가 흠칫 떨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입술을 옮겨 카게야마의 귓불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잘게 물었다.
"뭐 해 토비오, 책 안 읽고?"
귓가에 적나라하게 퍼지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거칠게 책을 넘겼다. 읽을 거거든요? 씩씩대는 듯한 그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키득키득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었다.
150106
"쿠니미랑 데이트 했어?"
아카아시는 엎드려 있는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 아슬아슬한 감촉에 카게야마가 이불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슬쩍 들었다.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 빼꼼 드러나는 것이 귀여워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세워 느리게 척추를 훑었다. 동시에 카게야마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네, 어제…."
"그럴 줄 알았어."
아카아시는 척추를 훑던 손가락을 날개뼈 근처로 옮겼다. 카게야마가 더욱 몸을 비틀었다.
"보통 성격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대단하네."
아카아시는 웃으며 곳곳에 남겨져 있는 붉은 자욱들을 쓰다듬었다. 네? 카게야마가 몸을 웅크리며 물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저와 아카아시의 관계를 모른다고 말했지만, 글쎄. 아카아시는 거의 등을 수놓다시피 한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방금 전 카게야마를 침대에 눕혀 놓고 관계를 가졌을 때 앞쪽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흔적들이었다. 목에도, 가슴에도, 전혀 그런 흔적들은 없었다. 오로지 등에만 한 가득이었다. 보나마나 카게야마는 모르고 있을 것이 뻔했다. 아마도 뒤에서 박아대며 카게야마를 함락시키고 그가 정신없이 쾌감에 몸부림치는 때에 한껏 그 살결을 집착적으로 빨아들였겠지. 이 사람은 내 것이다. 그런 흉흉한 눈을 하고서 짐승처럼, 마치 영역표시를 하듯 이를 세워 물어 뜯었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상하는 것은 쉬웠다. 쿠니미 아키라는 완벽하게 저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카아시는 골반 부근까지 손을 내렸다. 카게야마가 다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아카아시는 카게야마의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었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카게야마가 몸을 떨었다. 아카아시는 잘게 떨고 있는 카게야마의 양쪽 허벅지를 붙잡아 벌렸다. 으응… 카게야마가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이불에 더욱 얼굴을 파묻었다.
아카아시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피었다. 아카아시는 손가락을 뻗어 카게야마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연한 살결이 부들거렸다. 그곳엔 그 어느 자욱보다도 더 붉고, 검은 자국이 피멍처럼 깊게 새겨져있었다. 아카아시가 직접 입술을 묻어 새긴지 일주일도 더 된 곳이었다. 당연히 희미해져 거의 사라졌어야 할 자국이 오히려 더 짙어져 있었다. 바로 어제 새긴 것처럼, 붉은 기운을 잔뜩 머금고서 그렇게 아카아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나랑 똑같은 사람이라니까. 아카아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게야마의 허벅지를 더욱 벌려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앗, 아…! 카게야마가 약하게 신음을 내질렀다. 아카아시는 그러거나 말거나 반대쪽 허벅지를 빨아들이기 바빴다.
선전포고에는 마땅히 답해줘야지. 카게야마의 허벅지에 순식간에 또 하나의 피멍이 자리 잡았다.
150107 우카이 자취한다는 설정
"…가출은 아니지?"
나는 뜬금 없는 시간에 뜬금 없는 방문을 한 카게야마를 문 사이로 바라보며 말했다. 문 사이로 찬 바람이 끊임 없이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올 겨울 들어서 가장 추운 날씨라고 했던 것도 같았다. 나는 그제야 붉어진 코끝으로 몸을 떨며 서 있는 카게야마를 발견하곤 급하게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카게야마는 기다렸다는 듯 문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진짜 가출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카게야마의 손을 살폈다. 다행히 별다른 짐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았다. 그제야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인 방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허겁지겁 뛰어가 널브러져 있던 옷들을 한 데 모으고,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있던 재떨이를 들어 쓰레기통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또… 구겨진 채로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맥주 캔들까지 치우고 나니 조금 사람 사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사는 건 아니고 요즘 추워서 청소를 안 했더니…"
내 구차한 변명에 카게야마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깔려 있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뭐 하는 거야?"
내 물음에 카게야마는 이불 속에서 얼굴만 쏙 내놓고는 대답했다.
"추워서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고등학생이 저 보다 10살은 많은 성인 남성의 자취방에 대뜸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카게야마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끙, 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카게야마는 이제 이불을 쥔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배고프냐."
자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렇게 물었더니 눈을 번쩍 떠온다. 그것이 대답이라 생각하여 나는 냉장고로 향했다. 별다른 것은 없었지만 소세지나 계란 프라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 나는 얼마 전에 안주용으로 사둔 수제 소세지와 계란 몇 알을 꺼내 주방으로 향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가스불을 켠 후 칼집을 낸 소세지를 올리자 순식간에 고소한 냄새가 방을 메웠다. 그러자 딱히 배고프다 생각하지 않았던 나도 괜히 배가 꼬르륵대는 것 같았다. 나는 한 면이 잘 익은 소세지를 뒤집고 계란을 깨어 넣었다. 지글대며 계란이 익어가는 소리까지 완벽했다.
"……."
그리고 나는 계란 껍질을 버리려던 몸을 우뚝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등에 바싹 붙어 느껴지는 한기와 온기가 이상하게 섞인 체온 때문이었다. 카게야마.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내 허리에 두른 팔을 떼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래서 마음에 걸렸던 건데. 나는 한숨을 쉬며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카게야마의 손은 아직 차가웠고, 잡는 순간 그가 움찔거리는 것이 내게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내 방에 찾아왔던 것이 츠키시마나, 히나타나, 야마구치라면 나는 이렇게까지 동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내 방에 찾아올 일도 없었다. 카게야마였기에 문제였다. 늘 내게 온몸으로 애정을 갈구하던 카게야마였기에, 문제였다.
"우카이 씨."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렸다기보단 느껴졌다. 아마도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굉장히 뜨거웠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동시에 핸드폰에서 정각 12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카이 씨. 카게야마가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저 이제 18살이에요."
이번에는 내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아, 그랬나. 오늘이 카게야마의 생일이었나. 나는 카게야마의 손을 떼어내고 뒤를 돌아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전하려고 했으나 카게야마는 더욱 힘을 주어 나를 안을 뿐이었다. 그와 함께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그 말은,"
카게야마의 속삭임이 목덜미를 타고 등으로 흩어졌다.
"……이제 저랑 자도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이에요."
프라이팬에서 소세지와 계란이 익어가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나는 그 요란스러운 소리의 중심에서, 카게야마의 흩어지는 목소리 사이에서, 조용히 가스렌지의 손잡이를 돌렸다.
150113
"……우카이 씨."
"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카게야마가 내게 물었다. 초점이 사라진 눈과 슬슬 발음이 뭉개지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취기가 오른 모양이었다. 나는 혀를 차며 카게야마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놓았다. 아, 작은 목소리와 함께 카게야마의 머리가 흔들렸다. 딱히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맥주 두 캔이었다. 이제 자기도 술 마실 수 있는 나이라며 먼저 술 사들고 찾아온 주제에 두 캔 가지고 이 지경이 되어 버리니 어이가 없었다.
"곧 결혼하는 사람한테 그건 또 무슨 질문이냐?"
질문의 내용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땅콩 몇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카게야마는 이제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잘 들리지 않는 말들을 무어라 웅얼거리고 있었다. 취했으면 자라. 이불 펴줄 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게야마의 쪽으로 몸을 가까이 했다.
"…다고 해줘요."
"뭐?"
카게야마는 웅얼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카게야마가 조금 큰 소리로 숨을 들이 마셨다가 뱉어냈다. 은근한 술냄새와 뜨거움 숨결이 내 얼굴에 닿아왔다.
"…있다고 해줘요."
다시 한 번 뱉어진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는 명확한 발음을 하고 있었다. 나는 꾸벅꾸벅 흔들리고 있는 카게야마의 검은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역시 별 것 없는 술주정이었다. 나는 허무한 얼굴로 다시 땅콩을 털어 넣었다.
"그럼 예비신랑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 없겠냐."
카게야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슨 힘든 일이 있었길래 술주정이 이러냐.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각종 CF를 섭렵할 정도로 사랑받는 스포츠 스타가 된 주제에, 얼마 전에는 해외 유명 프로팀으로 입단까지 결정된 주제에 뭐가 힘들어서 이러나 싶었다. 하긴, 이 녀석은 옛날부터 힘든 것들을 전부 안에 꽁꽁 숨기고 살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홀로 품고 품고 또 품어내며 홀로 삼켜내기만 했었지. 나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카게야마의 둥근 머리를 바라보았다.
"있다고… 해줘요…."
카게야마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똑같은 말 하지마, 임마. 내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카게야마가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같은 말 반복하는 주사 최악이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려 입을 열었으나, 눈앞에 들어온 얼굴에 다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붉어진 얼굴로 붉어진 눈가에 영문 모를 눈물을 매달고 있는 그 얼굴에 차마 농담같은 말들을 던질 수가 없었다. 나는 카게야마의 이름 조차 부르지 못하고 그렇게 멍하니 그 아직 앳된 끼가 남아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천천히 카게야마의 입이 열리고, 나는 끝까지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게 나라고 해줘요."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에 나는 애써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제발, 제발요……."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그랬다.
그리고 곧 나의 비겁한 침묵 속에서 카게야마의 흐느낌이 이어졌다. 나는 여전히 말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150114
"…너는 안 먹어?"
쿠니미는 캐러멜의 껍질을 까던 손을 멈추며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턱을 괸 채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쿠니미는 슬쩍 시선을 돌려 바닥에 놓여진 빈 껍질의 개수를 세었다. 다섯 개. 그 중에서 카게야마가 먹은 것은 한 개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껍질을 까서 입에 캐러멜을 넣는 동안 빤히 쿠니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애초에 이곳에 오자고 먼저 말했던 사람은 카게야마였다. 쿠니미는 결국 먹는 것을 멈추었다.
"나는 별 생각 없는데."
카게야마는 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쿠니미는 들었던 캐러멜을 내려놓았다.
"네가 여기 오자며?"
카게야마가 쿠니미를 데려온 곳은, 캐러멜 전문 디저트 카페였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말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입술이 살짝 튀어나오고, 눈동자가 이리저리로 굴러가고, 미간이 꿈틀거리는게 아마… 부끄러워하는 건가? 쿠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게야마를 따라 턱을 괴었다. 쿠니미의 시선이 제게로 반듯하게 향해오자 카게야마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더 삐죽 내밀었다. 오리같아. 쿠니미가 생각했다. 미운 새끼 오리? 그렇게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걸렸다.
"……내가 먹으려고 온 건 아닌데."
"그럼?"
"네가 먹는 모습이 좋으니까."
의외로 카게야마는 덤덤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에 덤덤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쿠니미였다. 쿠니미는 입가에 걸었던 웃음을 슬그머니 내렸다. 카게야마는 아직 말을 다 하지 못한듯 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캐러멜 좋아하기도 하고… 네가 손가락 쓰는 게 보기 좋아서."
"손가락?"
쿠니미가 되물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말하려던 것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너 손가락 길고 예뻐서…… 캐러멜 집어 먹는 게 어울려. 그래서 내가 먹는 게 아까워서……"
카게야마의 말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처음의 그 덤덤한 말투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한껏 시선을 내려 깔아 애꿎은 캐러멜 껍질들에게 향해 있었다. 쿠니미는 들릴 듯 말 듯하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살짝 쿠니미를 향했다. 쿠니미는 반쯤 벗겨진 캐러멜의 껍질을 마저 벗겨내기 시작했다.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힐끗 쿠니미의 손을 바라보았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섬세하게 껍질을 벗겨내고 있었다.
"자."
그리고 껍질을 전부 벗겨낸 캐러멜을 집은 손가락이 카게야마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흠칫 몸을 떨며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면 내가 집어 드는 것도, 네가 먹는 것도 둘 다 할 수 있겠네."
카게야마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쿠니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여유로운 얼굴로 카게야마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안 먹을 거야? 나 팔 아파."
"어, 어, 으응……."
카게야마가 더듬더듬 말을 뱉으며 입을 벌렸다. 그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든 것도 같았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입에 캐러멜 하나를 쏙 넣어준 후 그대로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얼굴을 잡아 끌어당겼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저를 향했다. 쿠니미는 아직 다물리지 못한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가져다대었다. 달콤하면서도 짭쪼름한 맛이 고스란히 제게로 스며들었다. 쿠니미는 슬쩍 눈을 떴다. 미처 감기지 못한 눈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쿠니미의 입술이 살짝 떨어져 나왔다. 두 사람의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쿠니미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먹는 것도 할 수 있고."
그 말 뒤에 작은 웃음이 이어졌다. 쿠니미는 웃음 속에서 카게야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150114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좋아했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어른이었고,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어른. 그것은 내가 동경하고 사랑하는 단어였다.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지고,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을 타당하게 구분할 줄 알며, 자신의 생각을 똑똑하게 펼칠 수 있는 나이. 나는 그가 어른이라 좋았다. 나의 어림을 대신해줄 그의 어른스러움이 좋았다. 그리고 가장 그를 어른처럼 보이게 만드는 모습 중 하나가 바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잠자리를 가지며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기 전까지는.
그는 담배를 피울 때면 어른이 아니었다. 그는 제 힘으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할 때나,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을 판단할 능력이 사라졌을 때, 걱정과 고민을 제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 담배를 피웠다. 그가 포기한 것들이 불에 타고 재가 되어 희뿌연 연기가 되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와 그의 사이엔 10살이라는 나이 차이 외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곧 다른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10년의 시간, 그 동안 그가 쌓아올린 것들 중 하나는 미래에 일어날 많은 경우의 수들을 하나하나 예견하여 미리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와 잠자리를 가진 후에면 꼭 담배를 피웠다.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또 어떤 고민을, 걱정을 하고 있을까. 그가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서 흐트러지는 연기를 볼 때면 마치 내가 떨어지지 않는 짐이 되어 그를 얽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치님."
나는 이불을 얼굴 밑까지 끌어올리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뒤를 돌았다.
"무슨 생각 하세요?"
그는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열기가 가시지 않아 아직 붉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얌전하던 검은 머리가 볼썽 사납게 흐트러져있을 나를, 그의 아래에서 헐떡대느라 목소리가 다 쉬어버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가 타들어갔다. 침대 위로 회색의 재가 흩날렸다. 그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랑 잔 거 후회해요?"
그래서 내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이 너무나도 확연하게 보여 나는 작게 웃었다. 나와 한두 번 잔 것도 아니면서 그는 늘 나와 잠자리를 가진 후에 담배를 피웠다. 그 연기에 모든 것을 태워 날려보냈다. 열 살이나 어린 아이를 범했다는 죄책감을, 어른인 자신이 참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을, 그럼에도 나를 보면 잠겨있던 욕망이 눈을 떠버리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태워 날려보냈다.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이 떨어졌다. 그의 시선이 내 가슴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집착적으로 물고 빨았던 가슴으로. 엉망진창으로 붉은 자국들이 가득 남겨져 있을 가슴으로.
"후회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손을 뻗었다. 그가 다시 움찔거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쥐었다. 그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의 침에 젖은 담배가 순순히 내 손에 딸려 나왔다.
"내가 어른이 될게요."
나는 젖은 담배의 끝을 내 입으로 가져왔다. 내가 그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어른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듯, 그도 나를 그렇게 바라봐 주기를.
150118
우리는 연인이었다.
나는 과거형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관계를 떠올리며 잠든 너의 얼굴을 보았다. 곱게 내려앉은 속눈썹 위로 은은한 조명이 드리워졌다. 너는 그 때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너의 볼을 조심히 더듬어보려다 결국 멋쩍게 손을 거두었다. 떨리던 손끝은 차마 옛 애인의 살갗을 만지지 못했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볼을 쓰다듬는 것 조차 망설여지고 민망해지는 사이. 머쓱해진 손끝은 목적지를 잃고 배회하다 결국 옛 애인의 볼 대신 내 볼에 무겁게 착륙했다. 언제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매끈했던 얼굴은 이제 한없이 거칠고 푸석거리기만 했다.
2년. 2년의 시간동안 나는 많이 변했다. 우리의 관계가 과거형이 되던 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색을 했다. 네가 좋아하던, 그랬기에 나 역시 좋아하던 벽돌색 머리카락이 그렇게 꼴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작정 미용실에 찾아갔다. 검은색으로 염색해주세요. 나는 미용사가 내 머리를 만지는 긴 시간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뒤늦게 알아챘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너의 머리색이었다.
너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어제였다. 2년만의 연락이었다. 나는 액정 위로 떠오르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네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받았고 너는 말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네가 뱉어낸 말은 조금 당황스러운 문장이었다. 오이카와 씨, 우리 여행 갈래요?
그리고 나는 승낙했다.
우리는, 너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그 때와 같은 얼굴로 그 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그 때와 같이 나를 대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여행의 목적은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나 역시도 물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이 여행의 의미를 물었더라면 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으리란 것을. 그럼에도 나는 네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것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 두려웠을 것이다. 이상하게 2년 전보다 쉽게 지쳐하는 너를 보며, 조금 더 마른 것도 같은 너를 보며, 자꾸만 밭은 기침을 해대는 너를 보며 기묘한 생각을 하고 내가 만들어낸 그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워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다시 너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연인이었다. 나는 이 과거형의 관계가 싫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했다. 아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자꾸만 과거형으로 엮이는 관계가 싫었다. 나와 너의 관계가 순수한 백지였으면 했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 과거의 관계를 어설프게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 대신 백지 위에 새로운 것들을 그려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왜 이 마지막 여행에 나를 데리고 왔을까. 너의 삶을 정리하는 여행에 왜 나를 데리고 왔을까. 그것에 대한 답이 부디 내 바람과 맞아 떨어지길 원한다. 네가 나를 마치 편지를 봉하는 밀랍처럼 사용했길 바란다. 너의 마지막을 나로 정리하고 싶어했기를, 바란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여전히 얼굴은 껄끄럽고 거칠었다.
씁쓸한 침묵 속에서 희미한 너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슬아슬한 생명의 상징 속에서 어쩌면 나는, 과거형인 우리의 관계를 싫어한 것보다도 네가 과거형으로 변하는 것이 싫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150118
"스가와라 선배에게서 카레 향이 나요."
나는 당황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헤어진지 5분이나 지났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뜀박질 소리와 거친 숨소리에 뒤를 돌았더니 그곳엔 카게야마가 붉어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언가 전해줘야 할 것을 잊고 전해주지 못한 걸까 하는 생각에 나는 카게야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슨 일이냐 물었다. 카게야마는 무언가를 대답하려 했지만 대체 얼마나 전속력으로 달려온 건지 거친 호흡에 말이 전부 파묻히고 있었다. 진정해, 카게야마. 내 달램에 카게야마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동안 숨을 고르더니 겨우 작게 말을 내뱉었다. 스가와라 선배에게서 카레향이 나요.
"…그 말을 하려고 이렇게 뛰어온 거야?"
내 물음에 카게야마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긴 했는지 고개를 푹 숙인채로 멋쩍은 듯 제 손가락을 꼼질대었다. 나는 카게야마가 말을 이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카게야마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는 건지 계속 손가락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팔을 들어 코끝에 가져다대었다. 몇 번 크게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카레 냄새와 비슷한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그저 늘 같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풍길 뿐이었다. 나는 모르겠는데…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카게야마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둥근 머리를 긁적거렸다. 카게야마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였다.
"…저는 옛날부터 사람들을 향기로 인식하곤 했어요. 히나타에게는 오렌지 향이, 츠키시마에게는 독한 스킨 향이, 야마구치에게는 잔디 향이 나는 식으로요."
"아하…. 근데 나한테서는 카레 향이 난다는 거지?"
"그게……."
카게야마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확실히 천재는 뭔가 다른 건가 싶기도 했다. 사람을 향기로 인식한다니, TV 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인줄 알았는데. 확실히 내게서 카레 향이 난다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와 말할 것 까진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 그게 전부가 아니었는지 카게야마는 우물거리던 입술을 조심스레 떼어 말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따뜻한 햇살 향 같은 게 났어요."
……그런 향도 있나? 나는 머릿 속에 차오른 의문점을 굳이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갑자기 카레 향으로 바뀐 거예요. 그게 이상해서 계속 고민했는데… 혹시 스가와라 선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해서 결국 말씀드린 거예요."
카게야마는 마치 내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맺었다. 몇 달 전……. 내 중얼거림에 카게야마가 흠칫 몸을 떨었다.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요? 카게야마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손을 들어 슬슬 턱을 쓰다듬었다. 짐작 가는 게 있긴 하지. 카게야마는 내 목소리에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게 언제였지?"
"어… 세 달 전이요."
"카게야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카레……. 왜요?"
그 질문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카게야마가 걱정하고 있는 것의 진짜 원인을 알 수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여전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 듯했다. 나는 크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카게야마는 이상한 비명소리를 냈지만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와 허리를 푹 숙였다. 나는 시야에 고스란히 드러난 카게야마의 정수리를 다소 거칠게 쓰다듬었다. 으, 앗, 스가와라 선배? 당황한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나는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두 손으로 카게야마의 볼을 감싸 쥐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어안이 벙벙한 듯한 카게야마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 살피곤 그 멍한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잘 생각해봐, 카게야마."
나는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서있는 카게야마에게서 떨어져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알아오는 거 숙제야, 알았지? 카게야마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부르려 들었지만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콧노래를 부르며 가던 길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를 좋아하는 음식의 향기로 인식하다니, 이 얼마나 귀여운 연인인가. 결국 나는 집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걸고 들어가야만 했다.
150211 이와카게는 사귀는 사이, 이와이즈미와 마츠카와는 외사촌 설정
카게야마는 마치 제 집처럼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오늘은 이와이즈미가 괌으로 떠난 전지훈련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공항으로 마중이라도 나갈까 해서 이와이즈미에게 도착 시간을 물어봤지만, 뭐하러 그런 고생을 하냐며 이와이즈미가 절대로 비행기 시간을 알려주지 않는 탓에 카게야마는 깜짝 공항 어택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자니 무언가 찜찜하고 아쉬워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바로 이와이즈미가 오기 전에 제가 먼저 집에 들어가서 이와이즈미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한 상 가득 차려놓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요리에 자신이 있다거나, 요리가 특기라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옛날부터 남자들은 역시 요리 잘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에 기를 쓰고 연습해온 것이 이제는 그래도 중간은 하는 편이 되었다. 할 때마다 잔뜩 손에 화상과 찰과상을 입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카게야마는 낑낑대며 잔뜩 장을 봐온 것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자연스럽게 에이프런을 찾아 둘렀다. 이와이즈미의 집에 온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을 때 홀로 찾아온 것은 또 처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새삼스럽게 두근거리는 기분을 느끼며 장바구니에서 사온 것들을 꺼냈다.
뭔가 물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두부를 꺼내 껍질을 뜯던 카게야마가 손을 멈췄다. 잘못 들었나? 집 안은 고요했다. 카게야마는 두부를 꺼내며 봉지가 부스럭대던 소리를 물소리로 착각했다고 생각하곤 싱크대에 서서 물을 틀고 당근과 감자 등의 야채들을 뽀득뽀득 씻기 시작했다. 맛은 몰라도 깨끗해야지. 타지에서 고생하고 왔을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번 전지훈련 스케줄이 제법 빡빡하다며 출발하기 전 날 밤에 한숨을 잔뜩 쉬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이 정도로 빡빡할 줄은 몰랐지. 어느 정도로 빡빡했느냐 하면, 약 3주 간의 전지훈련 기간동안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와 통화한 횟수는 겨우 열다섯 번 정도에 불과했다. 이와이즈미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카게야마에게 싫은 소리를 먼저 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런 이와이즈미마저도 집밥이 먹고 싶다든가, 네가 보고 싶다든가 등의 소리를 하며 투정을 부릴 정도였으니 대충 그 훈련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의 성격 상 카게야마가 걱정을 하는 티를 냈다간 괜히 말했다며 자책할 것이 뻔했기에 걱정된다는 말도 못하고 그 마음을 꽁꽁 숨겨 겨우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랬기에 카게야마는 무슨 수를 써서든 이와이즈미에게 이벤트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고, 꼭 최대한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야채들을 빡빡 문질러 닦은 카게야마가 레시피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수도꼭지를 잠그고 적어온 쪽지를 살펴보는 순간, 무언가 확실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 이상했다. 제 어깨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이나, 귓가에 느껴지는 숨소리나, 허리에 둘러진 팔이나, 등 뒤에 바싹 붙은 인기척이나, 그 모든게 전부 이상했다. 카게야마는 숨을 멈췄다. 슬쩍 고개를 숙여 제 허리를 감싼 손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크고 투박한 남자의 손이 분명했다. 카게야마는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이와이즈미는 같이 사는 사람이 없었고,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을 터였고, 설사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 해도 지금 저를 이렇게 안고 있진 않을 것이다. …설마 이와이즈미 씨가 벌써 집에 와있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게야마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와, 우렁각시야?"
그것은 확실히 낯선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화들짝 놀라 급하게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낯선 남자가 제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단단하게 준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얇은 옷 너머로 닿아오는 남자의 살결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자의 살이, 축축하게 젖은 살결이 제 옷을 적셔오고 있었다. 놔, 놔주세요, 카게야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남자는 카게야마의 귓가에 제 입을 더 가까이 댈 뿐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숨소리에 카게야마는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싫어."
"그, 그만 하세요…!"
카게야마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말해보았지만 남자는 슬쩍 카게야마의 귓바퀴를 가볍게 깨물었다가 놓을 뿐이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들이 고스란히 카게야마의 어깨를 적셨다. 카게야마는 물이 닿는 느낌이 그렇게나 소름끼치는 감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남자는 이제 아예 혀를 내어 카게야마의 귀를 느리게 핥아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에 눈을 질끈 감으며 남자를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남자는 키도, 체격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머릿속에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남의, 남의 집에서, 이러면, 이러시면,"
"너야말로 남의 집에서 뭐하는데?"
카게야마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저렇게나 태연하게 대답해오는 남자의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제가 호수를 잘못 찾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비밀번호가 성립한 것하며, 인테리어고 배어있는 체취고 전부 이와이즈미의 것인 것하며, 여러가지로 그럴 리는 절대로 없었다.
"남의 집이라뇨…! 여기는 이와이즈미 씨 집인,"
카게야마는 억울한 마음에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며 말을 이어나갔지만 그 말을 다 끝맺을 수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목소리를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크고 투박한 남자의 손이 제 가슴 위에 자연스럽게 얹어져 있었다.
"오, 보기보다 별로 안 작네."
그리고 이어진 목소리는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장착된 퓨즈를 끊는 데에 충분했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야채를 다듬기 위해 꺼내두었던 칼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또 다시 남자가 더욱 빨랐다. 남자는 놀란 듯한 소리를 내며 재빠르게 카게야마의 손에서 칼을 뺏어들고는 카게야마를 붙잡고 있던 팔을 풀고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카게야마는 뒤를 돌아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카게야마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와이즈미 씨?"
"내가 그렇게 못생겼다고?"
이와이즈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목소리로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확실히 남자는 이와이즈미와 제법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이즈미보다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키도 훨씬 컸고, 조금 더 나른해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얼굴에서 조금 시선을 내린 카게야마는 급하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아까 전 느꼈던 그대로, 갓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인지 상체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로 하체에만 수건 하나를 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미안, 장난 좀 쳤어. 흠, 그 쪽은 이와이즈미 애인?"
남자가 머리를 긁으며 하는 말에 카게야마는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와이즈미 씨의 애인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고, 그게 또 장난이라고?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자꾸만 그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나체에 결국 다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츠카와 잇세이야. 이와이즈미랑은 사촌지간. 당분간 같이 살기로 했거든. 아니, 샤워하고 나왔는데 몸매 좋은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선 요리를 하고 있으니까 나로선 별 수 없었다고. 안 그래? 난 또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아서 신이 선물로 우렁각시라도 내려준 줄 알았네. 네가 이와이즈미 어쩌고 하길래 그제서야 애인인가 했지.“
150212 카게야마 in 아오바죠사이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던 손을 멈추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운동화의 끈을 묶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쿠니미를 올려다보았다. 쿠니미는 다른 곳을 쳐다보던 시선을 다시 카게야마에게로 가져왔다.
"아니야."
카게야마는 살짝 인상을 썼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적던 것을 마저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쿠니미는 느리게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카게야마는 전혀 느끼지 못했겠지만, 쿠니미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을 향해있는 시선을. 그것은 사냥꾼의 시선이었다. 사냥꾼들은 먹잇감을 향해 끝없는 시선을 던지지만 그것에 어린 집념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표출하는 순간 먹잇감들은 그것을 느끼고 재빠르게 도망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조용히 몸을 숨기고, 철저하게 집념을 지운 시선을 꾸준히 던진다. 사냥에 걸리는 시간은 길다. 오랜 시간동안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단 한 순간,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끈질긴 시선을 보낸다. 그런 사냥꾼의 시선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상대가 같은 사냥꾼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나는 알 수 있지.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이곳을 향하는 시선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속엔 그 무엇보다 들끓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다 머리에 구멍나겠네. 상대는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웃으며 다른 이들과 떠들고 있었지만 쿠니미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몸에 두르고 있는 기운이 남들과 다른 이. 날 때부터 사냥꾼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쿠니미는 말없이 상대를 응시했다. 상대는 여전히 떠들기 바쁜 것 같았지만 아마 그도 쿠니미의 시선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을 것이다.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집념이 이 공간을 짓누른다. 쿠니미는 드디어 제게로 고개를 돌린 사냥꾼의 얼굴을, 마츠카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마츠카와가 느리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쿠니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눈을 마주한 5초의 시간이 5시간처럼 흘러갔다. 마츠카와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벙긋거렸다. 쿠니미는 똑똑히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잘 지켜.
그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사냥꾼들 사이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상대의 먹잇감은 노리지 않는 것. 그 룰을 어기는 자는 그 세계에서 매장당하기 십상이었다.
아, 쿠니미는 그제야 제 상대가 사냥꾼의 탈을 뒤집어쓴 하이에나임을 깨달았다.
150214 친모아 토비오가 키세한테 고백했다가 차인 기념
"카게야맛치."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에 한 가득 밥을 퍼넣고 우물거리며 먹기 바쁘던 카게야마가 키세의 목소리에 불편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키세는 제 앞에 놓인 밥에 단 한 숟가락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부터 밥은 제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아예 그릇들을 한 쪽으로 밀어두고는 턱을 괴고 카게야마를 향해 집착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 시선은 너무나도 대놓고 강한 집념을 던지고 있어 그런 것들에 놀라울 정도로 무신경한 카게야마조차도 쉽게 밥을 씹어 삼키지 못할 정도였다.
"…이상한 호칭으로 좀 부르지 마요. 그리고 밥 안 먹을 거면 왜 시켰습니까."
카게야마는 찡그린 얼굴로 불만을 표했지만 키세는 여전히 뚫어져라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살짝 올라간 입매로,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차있는 그 번쩍이는 금빛 눈동자가 저를 마치 투시라도 하듯 끈덕지게 쳐다보았다. 카게야마는 더 이상 도저히 그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키세 료타는 늘 그런 느낌을 주었다.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로 쉬운 상대는 아니라는 느낌,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대라는 느낌. 분명 키세는 저와 같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제게 경어를 썼고, 그것 때문인지 혹은 키세 료타가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카게야마 역시 키세에게 쉽사리 동급생 대하듯 할 수가 없어 자꾸만 경어를 쓰게 되었다. 어쩌면 제가 잘 아는 그 선배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을 지니고 있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키세는 답이 없었다. 여전히 그 금색의 눈동자는 끈질기게 카게야마를 쫓아 따라다녔다. 카게야마는 애써 무시하려 노력하며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다시 고개를 숙이고 숟가락을 든 손을 움직였다.
"동경하는 거 지치지 않아요?"
바쁘게 숟가락을 움직이던 카게야마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드세요."
카게야마는 다시 숟가락을 움직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살짝 떨리고 있는 듯도 했다.
"숨기려고 해도 소용 없는데."
나지막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또 다시 손을 멈추곤 고개를 숙인 채로 눈동자만 움직여 키세를 힐끗 바라보았다. 키세는 보란듯이 카게야마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시야에서 그 눈동자만이 화려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겪어봐서 알지."
카게야마가 크게 몸을 떨었다. 낯선 감각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키세의 발이 툭, 툭, 움직이며 바지와 양말 사이로 살짝 드러난 제 발목의 복사뼈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우연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카게야마는 어쩐지 키세가 일부러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저 몸 전체에서 드러나는 여유롭고도 위험한 분위기가 딱 그랬다. 카게야마는 그런 것들을 무시하려 애쓰며 괜히 숟가락을 고쳐 쥐었다.
"힘들면 말해요."
키세의 발은 이제 카게야마의 발목을 가볍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싹 붙여 대고는 슬슬 위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떨쳐내려 괜히 크게 다리를 움직여 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지렁이 여러마리가 발목에 붙어 기어다니는 느낌에 카게야마는 다시 작게 몸을 떨며 발목을 뒤로 빼었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그만두는 방법,"
아, 이제 종아리까지. 카게야마는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어 키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키세는 카게야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이것을 기다려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까보다도 더 올라간 입매라든가, 슬쩍 휘어진 눈매가 그런 것들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키세는 나른하게 웃는 얼굴로 가만히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기분 나빠. 카게야마는 다른 곳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시선도, 발 끝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알려줄 테니까.“
150215
킨다이치. 쿠니미가 무표정한 얼굴로 불렀다. 그러나 킨다이치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쿠니미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뻗어 킨다이치의 어깨를 잡으며 다시 한 번 불렀다. 뭐 해, 킨다이치. 그러자 킨다이치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니미는 뒷걸음질을 치며 킨다이치에게서 살짝 거리를 두었다. 다행히 쉬는 시간 인지라 각자 떠들고 놀기 바빠 킨다이치 쪽을 쳐다보는 아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미, 미안, 쿠니미. 뭔데?"
킨다이치는 얼이 빠진 얼굴로 저를 부른 이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 조금 뒤에 떨어져 서있는 쿠니미를 발견하고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담임이 내려오래. 뭐 제출 안했다고 그러는 거 같던데."
"어, 어, 알았어. 고마워."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냐! 무슨 일은 무슨!"
킨다이치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손을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필히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쿠니미는 잠시 그런 킨다이치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 하고는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킨다이치는 다리가 풀려 무너지듯 다시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가 나도록 책상 위에 이마를 박고 엎드렸다. 옆 자리의 짝꿍이 흠칫 놀라며 옆을 돌아볼 정도였다. 킨다이치는 이를 악물고서 마구잡이로 얼굴을 흔들며 책상 위에 얼굴을 부벼댔다. 그렇게 하면 머릿속의 잔상이 좀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보란 듯이 더 짙어져 킨다이치의 머릿속에 찰싹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킨다이치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충동적으로 저질러버린 짓이었다. 전해줄 것이 있어 카게야마의 교실에 갔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카게야마를 발견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비어있는 그 옆자리에 앉고, 잠든 옆모습을 빤히 보다가 책상에 눌려 오리처럼 내밀어진 입술에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가져다 대어 버린 것은, 정말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붙이고 카게야마의 온기를 느끼고,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다시 눈을 떴을 때 카게야마의 눈이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킨다이치는 멍청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킨다이치? 약간 잠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을 때, 그제서야 킨다이치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으며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미, 안, 카게야마,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에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뛰쳐나와 제 반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오늘 부활동 빠질까. 킨다이치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어떻게 카게야마의 얼굴을 봐야할 지 아직 어린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150215
"오빠라고 해봐."
동시에 카게야마는 입을 틀어막고 거칠게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먹던 밥이 그대로 기도에 걸린 듯했다. 괜찮아? 쿠로오는 마치 저는 이 일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말투로 물으며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등을 두드렸다. 카게야마는 목에 걸린 이물질이 도통 빠지질 않는지 눈가에 눈물까지 매달고서 계속해서 크게 기침을 해댔다. 물론 중간 중간 틈이 날 때 쿠로오를 노려보는 것도 빼놓지 않았으나 쿠로오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조금 기침이 가라앉았을 무렵 쿠로오가 잔에 물을 따라 내밀었고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치며 쿠로오가 내민 잔을 받아 들어 마셨다.
"그렇게 두근거렸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요."
쿠로오는 양 손에 턱을 괴고 싱글싱글 웃으며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기침을 해댄 탓에 따끔거리는 목을 손으로 문지르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 한다는 소리가 저거라니, 저 사람의 머릿속은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키 180cm의 건장한 남고생, 그것도 운동하는 남고생에게 '오빠'소리를 들어서 뭐가 좋다고.
"왜 말이 안 돼, 내가 듣고 싶다는데."
"그건 쿠로오 씨네 학교 후배한테나 들어요."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어?"
어떻게 된 게 한 마디도 지질 않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내가 여자애들한테 오빠 소리 들으면서 학교 다니면 좋겠어? 그러자 쿠로오는 한 술 더 떠 신이 난듯 과장된 말들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을 말아야지 정말. 좋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가끔 쿠로오가 저를 보러 이곳까지 올 때면 저 사람 누구냐며 들뜬 목소리로 수군대는 여학생들만 봐도 짜증이 나는데, '오빠'라니. 카게야마는 밥맛이 떨어지는 걸 느끼며 억지로 입을 크게 벌려 밥을 쑤셔 넣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쿠로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보나마나 입가에서 웃음을 감추질 못하고 뿌듯한 얼굴로, 제가 다시 고개를 들 때까지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게 뻔했다. 내가 고개를 드나 봐라. 누구 좋으라고. 카게야마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며 입에 넣은 밥을 꼭꼭 씹었다.
"싫으면 네가 오빠라고 해주면 되잖아."
"아, 무슨 이 덩치로 오빠라고,"
다시 한 번 이어진 그 얼토당토 없는 요청에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친 쿠로오의 눈에 카게야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눈, 자신의 승리를 짐작하고 있는 눈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해 줘, 카게야마."
그럼에도 미워하지 못하는 건,
"오빠라고."
그 눈에 꼼짝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빠."
그 눈에 꼼짝도 할 수 없는 건,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그 눈을,
"……오빠라고요, 오빠!"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카게야마는 얼굴 전체는 물론 귀 끝까지 새빨개져 그릇에 얼굴을 박다시피 하고 빠르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작게 쿠로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따가 침대에서도 그렇게 불러줄 거지?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깊게 그릇에 얼굴을 파묻을 뿐이었다.
150215
이와이즈미 선배.
익숙한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려 노력했지만 어제 제 연인과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던 탓인지 도저히 눈이 떠지질 않았다. 결국 이와이즈미는 이불을 끌어올려 덮으며 더욱 몸을 웅크리고 간신히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자자, 카게야마…. 그렇게 목소리를 내뱉자 마자 바로 몸이 무거워지며 서서히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잠들기 직전의 그 몽롱한 기분을 느낀 이와이즈미가 다시 한 번 완전히 정신을 놓아주려는 찰나, 이번엔 카게야마가 아까 전보다 더 다급한 목소리로 이와이즈미를 불러댔다. 선배, 일어나시면 안 돼요? 어쩐지 그 목소리엔 울먹임이 섞인 것도 같아 이와이즈미는 영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제대로 정신을 잡을 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선배, 빨리요, 네? 이번엔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의 팔을 잡고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리 부근에 무언가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부드러운 털뭉치와 비슷한 것이 움직이며 이와이즈미의 다리를 간질이고 있었다. 뭐지, 동물 털 같은 느낌…… 강아지? 고양이? 꽤 부드럽네…….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본능적으로 베개에 얼굴을 더욱 파묻었다. 잠깐.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드는 것을 느꼈다. 우리 집에는 동물이라곤 전혀 없을 텐데?
"선배!"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가 소리를 빽 질렀고, 이와이즈미는 눈을 번쩍 뜨며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 흐릿한 시야 앞에는 카게야마가 어젯밤 지쳐 잠들었던 모습 그대로, 옷도 챙겨 입지 않은 채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위화감이….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들어 눈곱이 낀 눈을 문질러 비볐다. 흐릿했던 시야는 선명하게 돌아왔지만 그 알 수 없는 위화감은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잠이 덜 깬 듯한 멍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역시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카게야마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울상인 표정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뭐가 문제인 거지? 분명 똑같은 카게야마였다. 그러나 무언가 거대한, 거대한 위화감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대체 뭐가… 이와이즈미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아까 제 정신을 들게 만들었던 그 문제의 부드러운 촉감이 다시 한 번 이와이즈미를 간질였다. 이와이즈미는 바로 고개를 돌려 그 문제의 털뭉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꼬리?"
이와이즈미는 바보같은 얼굴로 혼잣말을 뱉어내며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 꼬리?? 이와이즈미는 다시 저를 간질였던 털뭉치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으로 길게 뻗은 꼬리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이와이즈미의 맨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꼬리가 이어진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꼬리의 끝은,
"……네 거야?"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던 카게야마의 맨 엉덩이였다.
"몰라요, 자고 일어나니까 이렇게 됐어요…. 꼬리뿐만이 아니에요. 이, 이거 어떡해요, 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카게야마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삐친 머리 하나 없이 공처럼 둥글었던 카게야마의 머리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솟아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 그 낯선 것을 살짝 쓸어보았다. 그러자 그것은 크게 쫑긋거리며 이와이즈미의 손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치, 이건,
"……귀?"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아까 전 제가 느꼈던 위화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검고 뾰족한 귀가 솟아있었다.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따뜻했으며, 움직이고 있는 귀가. 이와이즈미는 멍하니 카게야마의 엉덩이에 달린 꼬리와, 머리에 솟아난 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꿈인가? 이와이즈미는 손을 들어 제 볼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당연하게도 금세 고통이 뒤따라왔다. 이거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저 어떡해요? 금방이라도 크게 울음을 쏟아낼 것 같은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이즈미는 모든 것이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마치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 귀엽다……. 카게야마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먼 세상의 소리처럼 들려오고, 그 빈 자리를 메우듯 꼼질대는 검은 꼬리와 귀가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이와이즈미는 모든 생각을 지워냈다. 결국 남은 것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귀엽다'라는 생각 뿐이었다. 이와이즈미 선배, 듣고 있어요? 타박하는 듯한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귀엽네."
"……이와이즈미 선배!!"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그 하나 뿐인 생각에,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크게 이와이즈미를 불러댔다. 동시에 귀도 꼬리도 쭈뼛 솟아올랐다. 와, 진짜 고양이 같아……. 이와이즈미는 여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듯했다.
150217 쇼타가 좋습니다
카게야마는 무언가를 찾기에 열심이었다. 쿠니미가 바로 옆에 다가온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땅에 얼굴을 처박고서 무언가를 찾아대고 있었다. 쿠니미는 슬쩍 카게야마의 옆으로 다가가 제 얼굴을 카게야마의 얼굴 옆에 가까이 붙였다. 볼과 볼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붙였는데도 카게야마는 제가 온 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찾아?"
결국 쿠니미가 입을 열고서야 카게야마는 '히익!'하는 소리를 내며 벌떡 허리를 펴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바로 옆에 서있는 쿠니미를 보고는 또 다시 놀란듯 작은 몸을 허우적대다가 결국 낙엽더미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놀랐잖아, 쿠니미!"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투덜대며 땅에 손을 짚고 일어났다. 낙엽 더미에 넘어진 탓에 바지가 엉망이었지만 카게야마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 다시 땅으로 시선을 돌리곤 낙엽들을 헤집어대기 시작했다. 가만히 그런 카게야마를 보고 있던 쿠니미가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바지를 털어주었다. 카게야마는 놀란 듯이 움찔하더니 쿠니미가 제 바지를 털어주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쿠니미는 작은 손으로 꼼꼼하게 카게야마의 바지에 묻는 낙엽 부스러기들을 털어내었다. 고마워, 쿠니미! 언제 쿠니미를 원망했냐는 듯 카게야마가 밝은 목소리로 쿠니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쿠니미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거라도 있어?"
쿠니미의 물음에 카게야마는 여전히 바쁘게 낙엽더미를 헤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럼?"
"빨간 은행잎 찾는 중!"
빨간 은행잎? 동시에 쿠니미의 머리 옆에 물음표가 하나 떠다녔다. 쿠니미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에 빨간 은행잎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쿠니미는 전에 읽은 과학 도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은행잎은 세상에 없어."
"아니야, 있어!"
그러나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바라보지도 않고 작은 손으로 낙엽들을 계속해서 뒤적거리기 바빴다. 쿠니미는 가만히 그런 카게야마를 내려다보다가 카게야마의 옆에 허리를 숙이고 쭈그려 앉았다. 그걸 왜 찾는 건데?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얼토당토 없는 주장에 반박하는 대신 그 근본적인 이유를 묻기로 했다. 카게야마에게는 무조건 반대하는 것보다 그의 흥미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설득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쿠니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카게야마는 드디어 낙엽 더미에서 고개를 돌려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그 맑게 빛나는 눈동자엔 온통 즐거움이 가득 차있었다.
"빨간 은행잎을 다섯 개 모으면 소원을 들어준대!"
쿠니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그래?"
"토오루 형아가!"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잖아."
쿠니미의 말에 카게야마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게 빛나고 있던 눈동자가 조금 탁해진 듯했다. 내가 너무 단호하게 말했나. 쿠니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잔뜩 들떠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얼굴이 이제는 조금 부루퉁하게 변해 있었다. 쿠니미는 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일 때 짓는 표정이었다. 어느새 잔뜩 부어오른 볼이 그것을 대신 얘기해주고 있었다.
"아니야, 진짜랬어 이번엔!"
카게야마가 작은 목소리로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저번에도 그랬잖아. 보름달 뜬 날 자정에 냇가에서 샤워하면 선녀를 볼 수 있다고."
쿠니미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더욱 빵빵하게 부어오른 볼만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종종 카게야마에게 저런 장난을 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쿠니미에게도 쳤었지만 또래에 비해 아는 것이 많고 성숙했던 쿠니미는 저런 장난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로 카게야마에게만, 특히 쿠니미 몰래 치곤 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매번 거짓말인 걸 알고 다시는 안 믿는다며 울먹였다가 몇 주 후 쯤 다시 오이카와가 하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곤 넘어가곤 했다. 불과 한 달 전에도 오이카와가 저렇게 거짓말을 친 탓에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었다. 자다가 깬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카게야마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러 방문을 열었다가 아이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고, 온 동네 사람들을 깨워 다 함께 카게야마를 찾으러 다녔었는데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카게야마가 온 몸이 물에 젖은 꼴로 울며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카게야마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가장 먼저 한 말은, '선녀가 안 왔어요.'였다.
그 일로 오이카와는 어른들께 된통 혼이 났지만 이렇게 또 카게야마를 속인 걸 보면 슬슬 다시 주기가 찾아온 듯했다. 그래도 또 크게 혼나긴 싫어서인지 장난의 강도가 확실히 약해져있었다.
"그치만…… 소원 빌고 싶은데……"
카게야마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기 위해 카게야마를 따라 고개를 푹 숙였다. 카게야마는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입술을 비죽 내민 얼굴로 잔뜩 상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소원인데?"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달래려는 심산으로 가볍게 물었다. 그러나 카게야마의 반응은 조금 남달랐다. 그 가벼운 질문에 어쩐 일인지 화들짝 놀라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덩달아 쿠니미 역시 살짝 놀랐지만 크게 겉으로 드러내 보이진 않았다. 고개를 든 카게야마는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쿠니미의 눈동자를 마주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리저리로 눈을 굴렸다. 그리고 한 번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통통한 볼이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한참을 그렇게 쿠니미의 시선을 피해 이상할 정도로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다 결국엔 몸을 돌려 다시 낙엽더미에 손을 뻗었다.
"……비밀이야."
작은 웅얼거림이 들리고, 동시에 카게야마는 아예 낙엽 더미에 얼굴을 파묻고서 낙엽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아까 전보다 훨씬 거칠고 과격해진 몸짓이었다.
150218
키스할래?
그는 가끔씩 그렇게 물었다. 그것도 굉장히 뜬금없는 때와 장소에서 묻곤 했다. 예를 들면, 꽉 막힌 도로 위 그의 자동차 안이라든가, 배부르게 밥을 먹은 후 입가심으로 디저트를 먹을 때라든가, 시내 한복판에서 만난 직후라든가. 내가 단 한 번도 그 제안에 거절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거절할 리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는 습관처럼 내게 물었다. 키스할래?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그 물음에 다른 대답을 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잠시간 지나치던 당황스러운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왜 매번 물어보시는 거예요?
나의 물음에 그는 잠시 동안 답이 없었다. 나는 기세를 몰아 한 번 더 물었다.
어차피 제가 거절하지 않을 거란 걸 아시잖아요.
그리고 그의 얼굴엔 다시 평소와 같은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역시나 내가 그에게 당혹스러움을 선사할 수 있었던 건 아주 잠시 뿐이었다.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야.
그는 햇빛이 묻은 손으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에 묻은 햇빛이 내 머리카락 위에서 따뜻하게 부스러졌다.
나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도박은 절대로 안 하니까.
그의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때의 네가 좋아.
그는 내 머리카락에 잔뜩 햇빛을 묻혀 놓던 것을 그만두었다.
내가 키스할래, 하고 물었을 때 눈동자 가득 오로지 나 하나만을 담고 있는 네가 좋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내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가 살짝 몸을 낮췄다.
오늘은 아직 못 본 것 같거든.
그의 눈동자 속 어둠이 전부 나를 메웠다. 머리카락에 묻은 햇빛이 눈동자 속으로 푸슬푸슬 떨어져 노르스름한 빛이 났다.
키스할래?
익숙한 물음이 들렸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주말의 오후, 그 도시 한 가운데에서 나는 느리게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네.
그의 입술이 슬그머니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해요.
그 순간, 그의 전부가 모두 내 것이었다.
150219 #멘션으로_키워드세개주시면_140썰로_돌려드립니다
1. 세터카게 (10影) / 손톱, 양말, 가방
늘 정갈하게 다듬던 손톱이 내 등에 파고드는 기분은 참 색다른 것이었다. 나는 카게야마의 입에 물려놓은 양말을 더욱 깊숙히 밀어넣으며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미처 가방조차 벗지 못한 후배가 내 밑에서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원망스런 눈을 하고서.
2. 츠키카게 / 꿈, 미련, 코트
짧은 꿈을 꾸었다. 카게야마와 고등학교 유니폼을 입고 함께 코트에 선 꿈이었다. 나는 그것이 짙은 미련의 여운임을 안다. 코트가 아닌, 카게야마에 대한 미련임을 안다. 죽은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봤자 부질 없다는 것도 안다. 알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3. 오이카게 / 질투, 구속, 원망
질투도, 구속도 하지 말아요. 카게야마가 묶인 손으로 오이카와의 손을 쥐고 쓰다듬었다. 어차피 나는 당신 거니까.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나를 원망해?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럴리가요. 카게야마가 대답했다. 그런 당신까지 좋아하는걸.
4. 우카게 / 꿈, 환상, 서랍
꿈같아요? 서랍에서 익숙하게 콘돔을 꺼내 든 네가 묻는다. 이미 그 답을 알기에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야릇하게 웃으며 웃옷을 벗고 자연스레 내 위에 올라탄 너는, 동시에 환상처럼 서서히 사라져간다. 그래, 나는 벌써 2년째 너를 꿈꾸며 몽정한다.
5. 마츠카게 / 넥타이, 키스, 붉은색
마츠카와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세게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었다. 넥타이가 쓸린 탓에 손목엔 붉은색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누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고 물으면, 마츠카와는 느릿하게 웃으며 자국 위로 키스했다. 주인님한테 묶여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해.
6. 츠키카게 / 칼, 먼지, 약속
깨끗하게 빛나는 주변과 달리 칼 위에만 먼지가 도톰하게 쌓여 있었다. 금방 돌아올 게. 약속해. 그렇게 말하며 츠키시마가 주고 간 칼이었다. 카게야마는 일부러 칼의 먼지만 청소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 먼지들이 칼을, 츠키시마를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
7. 우시카게 / 눈물, 욕망, 허리
그는 이상하리만치 내 눈물에 집착했다. 좋아서 우는 것이건, 아파서 우는 것이건 내가 눈물을 흘릴 때면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욕망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일부러 눈물을 짜낸 것을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8. 츠키카게 / 이불, 의자, 바코드
이불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츠키시마의 흔적을 발견했다. 작은 바코드 택이었다. 티셔츠 뒤에 달린 것을 떼어주려다 츠키시마의 키가 너무 커서 떼기가 힘들었던 탓에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떼준 것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곤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150220 키타이치 시절. 토비오가 애기같음 주의
이와이즈미는 크게 기지개를 켜며 슬쩍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던 터라 피곤한 탓에 최대한 일찍 잠들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숙제가 많아 밀린 숙제들을 한다는 것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이와이즈미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뻗어 책상을 환하게 비추던 스탠드를 껐다. 졸음이 밀려와 몸이 무거운 것이 물기를 머금어 늘어진 솜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느리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장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때마침 울려대는 진동 소리에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찌푸리며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이 늦은 시간에 웬 전화야. 액정에 표시된 번호는 제 전화부에 등록 되어있지 않은 번호였다. 늦은 시간에 걸려온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전화라니. 이와이즈미는 고민하듯 액정을 노려보았다. 스팸 전화일 게 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자꾸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이 영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래, 받고 나서 스팸이면 바로 끊으면 되는 거니까.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이와이즈미 군?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낯선 여성의 것이라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네, 맞는데요."
- 아, 저 토비오 엄마예요.
이와이즈미는 잠시 저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아, 네, 안녕하세요. 하고 겨우 인사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멍한 기분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늦은 시간에 배구부 후배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와이즈미는 어쩐지 저도 모르게 공손하고 바른 자세로 서서 휴대 전화를 고쳐 쥐었다.
-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감독님도 오이카와 군도 전화를 안 받아서 이와이즈미 군에게 걸었어요. 혹시 지금 토비오랑 같이 있나요?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와서…
"아니요, 저는 진작 집에 들어왔어요. 카게야마가 아직도 안 들어왔어요?"
- 네, 이렇게 늦은 적이 없는데…
"그럼 일단 제가 한 번 학교 체육관에 다시 가볼게요."
- 이렇게 늦은 시간에 괜찮겠어요?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와이즈미는 어깨로 휴대 전화를 고정시키곤 급하게 바지를 갈아 입고 티셔츠 위에 겉옷을 꿰어 입기 시작했다.
"감독님도 오이카와도 없으니까 저 말고는 가볼 사람도 없는데요 뭐. 괜찮습니다. 일단 거기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연신 고맙다고 말하는 목소리와 함께 아마 별일 없을 거라며 카게야마의 어머니를 진정시킨 이와이즈미는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이와이즈미도 꽤나 마음이 급했다. 다른 날이었다면 어디서 배구 연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볼 수 있었지만 하필 오늘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날카롭게 신경이 선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뺨을 맞을 뻔한 오늘이었기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동경했다. 오이카와는 몰라도 이와이즈미는 알고 있었다. 늘 올곧게 오이카와를 향해있던 그 어린 눈에서 이와이즈미는 모든 것들을 다 읽어낼 수 있었다. 그토록 동경하던 사람에게 뺨을 맞을 뻔했으니, 아직 어린 카게야마가 그 상처의 크기를 감당하기 어려운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약한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제가 카게야마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와이즈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충격으로 몰래 체육관에 숨어들어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기를 바라며 학교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떨리는 손으로 굳게 잠긴 문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체육관을 울리고, 싸늘한 공기가 이와이즈미를 맞이했다. 척 봐도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래도 이와이즈미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눌러 체육관의 불을 켰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제가 문을 잠갔던 저녁 이후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듯 체육관의 공기는 썰렁하기만 했다. 이와이즈미는 눈으로 천천히 체육관을 훑었다. 전부 이와이즈미가 잠그고 나왔던 거대로였다. 곧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한 군데에서 멈췄다. 딱 하나, 다른 곳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곳보다 낮은 온도 탓에 찬 공기가 새어나온다며 꼭 닫아놓던 창고의 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조심스럽게 문 앞에 다가간 이와이즈미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잡고 활짝 열었다. 동시에 마음을 무겁게 죄어왔던 모든 걱정과 죄책감들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와이즈미는 헛웃음을 지으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체육관보다도 싸늘한 공기가 순식간에 이와이즈미의 몸을 감쌌다. 이와이즈미는 그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걱정스런 얼굴로 매트 위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형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위아래로 배구부의 져지를 입고서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잠들어있는 작은 몸을 이와이즈미가 손을 내어 살짝 돌려보았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와이즈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카게야마, 일어나."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이 추운 데서 잘도 자고 있었네. 이와이즈미는 부드럽게 카게야마를 흔들며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보니 카게야마에게 먼저 가라고 했을 때 문으로 나가는 걸 본 적이 없는 것도 같았다. …그게 이제야 생각나다니. 이와이즈미는 자책하며 카게야마를 한 번 더 흔들었다. 카게야마는 곤히 잠들었는지 얼굴을 살짝 징그릴 뿐 눈을 뜨진 않고 있었다.
"카게야마, 늦었어. 집에 가서 자야지. 일어나."
"응…… 엄마…"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가 몸을 뒤척이며 작게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렸다. 엄마? 이와이즈미는 작게 웃으며 카게야마를 다시 한 번 흔들어 깨웠다. 그래도 일어날 기색이 보이질 않아 이와이즈미는 최후의 수단으로 카게야마의 몸을 제 팔로 받치고 일으켜 세우려 들었다.
"조금마안…… 더 잘래… 10분만요……"
카게야마는 마치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처럼 이와이즈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어어? 이와이즈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빼내려했으나 계속해서 자고 싶다는 카게야마의 욕망이 더 강했던 건지 카게야마는 그럴 수록 이와이즈미를 세게 끌어안고 다시 몸을 매트에 누우려 들었다. 카, 카게야마, 잠깐, 이와이즈미가 말을 더듬으며 카게야마를 깨우기 위해 몸에 힘을 주어 일으키려 했지만,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을 치며 이와이즈미를 제 품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엄마아…… 졸려요…"
"……여기 집 아니야, 카게야마. 나는 엄마도 아니고."
어쩐지 귀끝까지 붉어진 이와이즈미가 작은 목소리로 카게야마에게 상황 설명을 하려 들었지만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제대로 전해지진 않은 듯했다. 그 증거로, 이와이즈미의 볼에 닿아온 카게야마의 입술이 있었다. 쪽 소리를 내며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이와이즈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으응, 아침 뽀뽀해써요… 그러니까 더 잘게요……"
이와이즈미는 목석처럼 굳어진 몸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카게야마의 품에 안긴 채 매트로 무너지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저를 깨우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금세 다시 잠든 것인지 창고엔 쌕쌕대는 아이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카게야마가 팔을 둘러 안은 제 몸과, 카게야마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볼만이 후끈거렸다.
150222
확고한 둘의 식성 때문인지 데이트 장소를 고르는 것은 꽤 어렵지 않았다. “점심은 뭐 먹을까?“라는 하나마키의 질문에 카게야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레요!” 하고 대답했고, “점심 먹고는 어디 갈까요?”라는 카게야마의 질문에 하나마키 역시 고민하지 않고 “디저트로 슈크림 먹으러 가자.”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다행히 하나마키도 카레를 싫어하지 않았고, 카게야마 역시 슈크림을 싫어하지 않아 둘 다 상대의 제안에 바로 긍정함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데이트 계획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런 데는 처음 와 봐요.”
카게야마는 카페에 들어설 때부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하나마키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고 웃으며 익숙한 듯 평소에 자주 앉던 구석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디저트 카페라서 좀 아기자기하긴 해.”
다행히도 아주 작고 여성스러운 느낌의 카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디저트 카페라는 이름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그래도 이 근처에서 가장 슈크림을 잘 하는 곳이었기에 하나마키는 오이카와의 놀림이나 —맛키는 열네 살 소녀인가요?— 그에 신나서 맞장구를 치던 마츠카와의 말에도 —왜 그래, 슈크림도 먹고 여자애들도 보고 일석이조로 즐기고 싶을 수도 있지.— 꿋꿋하게 종종 들러 슈크림을 사곤 했다.
“슈크림 말고 다른 거 먹을래?”
카게야마는 한참동안 메뉴판을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하나마키 씨가 먹는 거 먹을래요.”
“다른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하나마키 씨가 좋아하는 게 무슨 맛인지 궁금해서요.”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뱉었을 그 말에 하나마키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꽤 노력해야만 했다. 카게야마가 어떤 맛을 좋아할지 몰라 최대한 다양한 종류로 여러 가지를 주문한 하나마키는 슈크림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카게야마를 향해 괜히 한 번 손을 흔들어주었다. 카게야마는 쑥스러워하며 —사실 댜른 사람이 보기엔 무표정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지난 몇 달 간의 경험으로 하나마키는 저게 부끄러워하는 표정임을 알 수 있었다.— 살짝 손을 흔들다가 이내 조금 딱딱해진 얼굴로 흔들던 손을 멈추었다. 왜 저러지? 하나마키는 우선 주문한 슈크림이 나왔다는 소리에 몸을 돌려 슈크림이 든 쟁반을 받아 들어 카게야마가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왜 그래?”
하나마키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카게야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여 입을 비죽 내밀고 있었다. 하나마키는 일부러 장난을 치듯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입술을 살짝 꼬집듯이 쥐어보았다. 그 행동에 카게야마는 몸을 흠칫 떨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그제서야 하나마키는 쥐었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아니… 아까 하나마키 씨가 손 흔드는데…”
“흔드는데?”
카게야마의 얼굴에 다시금 민망함이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옆에 여자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키 크고 괜찮다면서……”
카게야마는 이리저리로 눈동자를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하나마키는 무언가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제 앞에서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만 쳐다봐요. 카게야마가 우물거렸다. 하나마키는 카게야마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제가 빤히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접시 위에 놓인 슈크림들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카게야마의 입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하나마키의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손을 들어 하나마키가 건넨 슈크림을 잡고 그대로 벌어진 입으로 가져갔다. 볼이 가득 찰 정도로 커다랗게 한 입을 베어물고 우물대기 바쁜 카게야마를 보며 하나마키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하나마키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카게야마가 우물거리던 것을 멈추고 살짝 고개를 들어보았다.
“……어차피 여기서 괜찮아 보이는 건 너밖에 없는데 뭐.”
하나마키는 조금 전의 카게야마처럼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민망함이 물든 얼굴로 말을 끝냈다. 아, 역시 이런 건 영 못하겠다니까. 하나마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과장되게 큰 목소리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어때, 맛있지?”
그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입에 물고 있던 것을 꿀꺽 삼켰다. 여전히 멋쩍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아까 전보다는 더 자연스러워진 얼굴이 하나마키를 향했다.
“네, 맛있어요. 하나마키 씨가 좋아하는 거여서 그런가, 하나마키 씨랑 비슷한 느낌이네요.”
“뭐가? 슈크림이?”
슈크림이 저와 비슷한 느낌이라니, 무슨 의미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하나마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게야마는 슈크림을 한 입 더 베어 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원하고 달콤하잖아요.”
“…….”
얘는 대체 부끄러워하는 기준이 뭘까. 하나마키는 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조금 전에 했던 말보다도 지금 뱉어낸 말이 더 민망할 것 같은데. 아마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제가 ‘질투’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는 점이고, 후자는 이게 듣는 이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고 그저 제 생각대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라는 점일까. 하나마키는 더 이상 화제를 돌릴 만한 말도 떠올리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함께 팔을 뻗어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세요?”
“아냐…… 아무것도.”
하나마키는 중얼거리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을 뿐이었다. 이 아이 같은 연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며 정강이를 걷어찰 고민을 하나마키는 오늘도 깊은 한숨과 함께 되뇌고 있었다.
150301 개강하기 싫으니까 교수님 우시지카 x 대학생 카게야마
"왜 또 입이 나왔어."
우시지마는 침대 헤드보드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으며 말했다. 할일도 없으면서 괜히 침대에 엎드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카게야마가 우시지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를 쳐다보기는커녕 책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천천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저 보지도 않았으면서."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돌려 베개에 턱을 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연락이 온 곳도 없었고, 할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텅 빈 배경화면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다 보여. 지금 막 더 튀어나왔네."
스마트폰을 만지던 카게야마의 손이 뚝 멈추는가 싶더니 곧 카게야마가 엎드려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바로 앉았다. 그리곤 아랫입술을 한껏 내밀고 우시지마를 쳐다보았다. 우시지마는 끝까지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결국 카게야마가 입술을 열어 한 마디 하려는 찰나, 우시지마가 소리나게 책을 덮어 제 옆에 내려놓고는 책에서 한 번도 떼지 않았던 시선을 카게야마에게로 옮겼다.
"개강하기 싫어요."
그와 함께 카게야마의 입에서 부루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시지마는 손을 뻗어 잔뜩 바람이 들어간 카게야마의 볼을 가볍게 쥐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이었지만 우시지마의 손을 내치진 않았다.
"나는 좋은데."
그와 함께 카게야마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교수라 이거죠?"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삐딱해지며 우시지마의 손을 잡으려 들었지만 우시지마는 재빠르게 쥐고 있던 카게야마의 볼을 놓고 대신 그의 머리로 옮겨갔다. 개강 전야제라며 하루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린 탓에 늘 부드럽게 아래로 흘러내리던 검은 머리는 제멋대로 뒤집어져 뻗쳐있었다.
"교수들도 개강은 싫어해. 수업하기 얼마나 피곤한데."
우시지마가 천천히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눈썹을 찌푸렸지만 조금 전처럼 우시지마의 손을 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자존심 상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우시지마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우시지마가 머리에 손을 가져다댈 때면 무방비한 표정으로 풀어지는 것을 우시지마는 종종 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콕 찝어 말하지는 않았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그런 무방비한 표정이 좋았다. 만일 제가 카게야마의 그런 상태를 본인에게 말해준다면 그 후로는 절대로 그 표정을 지으려 들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카게야마는 조금 전보다 많이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우시지마는 손끝으로 간질이듯 카게야마의 머리를 천천히 헤집으며 입을 열었다.
"너 볼 수 있잖아."
"…그럼 방학이 더 낫죠. 방학 때는 종일 붙어있는데."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우시지마는 머리를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그의 양쪽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내 수업을 들을 때의 네 표정이 좋아."
우시지마가 카게야마의 코 끝에 제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수업이 아니라 나한테 집중하는 게 다 보여서."
우시지마가 느리게 얼굴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이번엔 입술이 닿을 정도가 되었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뜨거운 숨결이 제 입술에 닿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며 속눈썹을 떨었다.
"날 보면서 키스하고 싶다, 끌어안고 싶다, 섹스하고 싶다, 생각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다 드러나서 좋아. 꽤 흥분되거든."
"……교수님 지금 엄청 변태같아요."
카게야마가 입술을 벌려 움직이자 버석하게 마른 두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부정은 안하네."
우시지마의 그 말을 끝으로 카게야마는 제 입술이 뜨겁고 축축한 것에 집어 삼켜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150306 여우카와 x 토끼오 / 토끼는 상상임신을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오이카와는 제 품 안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잘게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아직까지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어느새 아침이 밝았는지 눈부신 햇살이 창문을 통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며 몇 번 더 눈을 끔뻑거리고 나서야 겨우 제대로 눈을 뜰 수 있었다. 강렬한 햇살이 정통으로 침대를 내리쬐고, 그 햇살을 따라 창문에서 침대까지 시선을 옮기면 배 부근까지 이불이 흘러내려 맨 어깨를 드러내고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연인이 있었다. 햇살을 받은 덕에 유독 더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잠든 탓에 축 늘어진 기다란 검은 귀, 살이 없어 고스란히 윤곽이 드러나는 어깨, 그 아래로 이어지는 붉은 흔적들. 오이카와는 그것들을 찬찬히 훑으며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이곤 헛기침을 했다. 카게야마와 교제한 뒤로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던 지난밤이 고스란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이니 최대한 조심스레 해주자는 첫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카게야마의 안에 뜨거운 것들을 분출해내며 그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까지 밀어붙인 후에야 만족하고 잠들 수 있었다. 애교도 없고 뻣뻣하기만 했던 카게야마가 침대 위에선 그렇게 야하게 굴 줄은 몰랐다는 것을 핑계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오이카와는 잘게 떨고 있는 카게야마의 몸을 바라보았다. 둘 다 지쳐 씻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잠든 탓에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고스란히 알몸인 상태였다. 왜 이렇게 떨지, 추운가?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게야마의 부드러운 등에 몸을 붙이고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아래쪽에 부드렇게 닿아오는 몽실몽실한 꼬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게 뭐라고 또 사랑스럽고 야하게 느껴지는지,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해야만 했다. 침대에 얼굴을 처박고 엉덩이만 들어올린 채로 울어대던 카게야마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한 손으로는 그의 마른 허리를 잡고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며 다른 한 손으로는 크고 탐스러운 솜뭉치처럼 생긴 꼬리를 쓰다듬었던 기억까지 떠올라 오이카와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카게야마의 어깨에 급하게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저보다 조금 작은 몸이 크게 튀어오르며 '힉!' 하는 요상한 비명소리를 내었다.
"토비오? 일어나 있었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뒷목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그를 끌어 안았던 손을 얼굴 쪽으로 올려 볼에 손등을 대어보았다. 열은 없는데.
"추워? 옷 입을까?"
그렇게 말하며 오이카와가 제 얼굴을 카게야마의 얼굴 옆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동시에 들려온 낯선 소리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을 뚝 멈추었다.
"울어……?"
카게야마에게서 들려온 것은 흐느끼는 소리였다. 오이카와는 다급하게 카게야마의 몸을 제 쪽을 바라보도록 돌렸다. 눈앞에 보인 카게야마의 얼굴은 이미 잔뜩 눈물로 젖어 범벅이 된 상태였다. 오, 오이, 카, 와, 선배, 카게야마가 눈물을 쏟아내며 더듬더듬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어디 아픈 건가? 어제 너무 무리하게 했나? 오이카와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타고 쏟아져내리는 눈물을 급하게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무슨 일이야, 응?"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목에 팔을 두르고 와락 끌어안았다. 오이카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카게야마를 마주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등을 쓸어내렸다. 카게야마는 그러고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훌쩍거리는 울음 소리만 가득 침실을 메울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듯한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고심하며 순식간에 말라버린 입술을 천천히 혀로 축였다. 이러다 헤어지자고 하는 거 아냐? 아, 아니지, 그럼 날 끌어안았을 리가 없지. 그럼 그냥 악몽 꾼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거칠게 해서 아파서? 다시는 섹스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렇게 오이카와가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카게야마의 등을 계속해서 쓰다듬기만 하던 중, 드디어 카게야마가 쉬어버린 목소리를 조심스레 밖에 내었다.
"저, 저, 오이카, 와, 선배……."
"응, 토비오쨩. 무슨 일이야?"
오이카와는 눈물에 젖은 카게야마의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말했다. 본인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우선 잔뜩 겁먹은 듯한 카게야마를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기에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을 다정하게 마주보며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가 제 얼굴을 감싼 오이카와의 손을 붙잡고 떼어냈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손을 이끈 곳은, 그 자신의 배였다. 오이카와는 손 끝에 닿는 말랑한 살결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카게야마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또 다시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었다.
"…………한 거 같아요."
"안 들렸어, 토비오. 뭐라고?"
눈을 꼭 감고 입술을 달싹이는 카게야마에게서 새어나온 것은 목소리라기 보다는 숨소리라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입가에 제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며 다시 한 번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게야마는 살짝 뜬 눈으로 차마 오이카와를 제대로 마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맺혀있던 눈물이 그대로 흘러내렸다.
"임신…… 한 거 같아요."
"……어?"
오이카와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초점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하루 만에 임신을 할 수 있어? 정말? 아니, 애초에 섹스한지 하루도 안 돼서 임신한 걸 알 수 있어? 아니지, 아니, 그것보다 토비오는 남자인데?! 무수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오이카와가 미처 카게야마에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손을 더욱 세게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여, 기, 자꾸 발로 차는 느낌 들고… 꿈틀대는 느낌도…… 속도 안 좋고… 어, 어떡하죠? 부모님이 알면… 아니 그것보다도 오이카와 선배는, 여, 우고, 저는, 토끼니까… 애기가 기형아라거나…… 아, 어떡해요, 어떡하지, 어떡해요 선배…"
그 와중에 걱정하는 부분이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의 건강이라는 게 참 그답다 싶어서 오이카와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줘야… 오이카와는 제 앞의 바보같다 싶을 정도로 어린 연인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또 귀여워 보이는 제 눈을 원망하며 천천히 카게야마의 귀를 쓰다듬었다.
150307 자살하기 전에 여행가는 쿠니미가 그곳에서 카게야마를 만났으면 좋겠다. 언젠간 이어쓰겠지.
생각보다 짐은 많지 않았고, 돈은 많았다. 기계처럼 돈을 벌었지만 막상 그것을 쓸 곳은 없었다.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최소한의 활력을 느끼기 위해 일을 할 뿐이었다. 일을 하는 것이 아주 큰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진 않았겠지. 하지만 아주 효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진작 삶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적어도 십 년 전쯤에 말이다.
나는 여행에 필요한 짐만 모아 트렁크 하나에 싣고 나머지 것들은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하다가 태우기로 결심했다. 물건을 많이 쓰는 편도 아니고, 더럽게 쓰는 편도 아니라 대부분의 것들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중고샵에 내놓을까 했지만 더 이상 돈은 필요하지 않았고, 자살할 사람—곧 자살한 사람이 되겠지.—의 물건을 다른 이에게 쓰게 하는 것도 께름칙했다. 물론 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께름칙할 거라는 뜻이다. 결국 나는 전자제품들은 모아 고물상에 팔아버리고 나머지 것들은 모아 휘발유를 뿌렸다. 그중엔 꽤 아끼던 소설책도 있었다. 나는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았다. 곧 따라갈게. 답지 않게 그런 감성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집을 팔았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통장에 쌓여 있었다. 골치가 아파졌다. 내가 계획한 여행은 그리 긴 여행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많은 돈은 필요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돈을 쓸 만한 곳이 없었다. 여행지에서 사치스러울 정도로 돈을 펑펑 써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나는 돈을 쓰는 법을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소란스럽게 나를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조용히 괜찮은 곳들을 떠돌아다니다 조용히 숨을 거두고 싶었다.
결국 나는 내가 자랐던 고아원에 천만 엔 가량을 단번에 기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아원을 맡아주던 수녀님은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내게 누구냐고 물었지만 나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나를 붙잡고 종일 수다를 떨고 싶어 할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에 괜히 쓸데없는 끈 하나를 달고 가봐야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나는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자주 두통이 오곤 했다.
150308 킹스맨AU지만 1도 상관없이 넥타이 매주는 내용이 전부
"저, 저기요,"
문 밖에 놓여진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우시지마가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누가 보면 내가 천만 가져다 주고 직접 만들어 입게 한 줄 알겠군."
우시지마는 삐딱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 어설픈 차림으로 서있던 카게야마는 저를 바라보는 우시지마의 얼굴에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카게야마의 복장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차림이었다. 우시지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넥타이 맬 줄 모르면 모른다고 말을 했어야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카게야마는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실크 소재의 넥타이를 손끝으로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무엇에 부끄러웠던 건지는 모른다. 넥타이를 맬 줄 모른다는 것 자체인지, 혹은 넥타이를 매어 볼 일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이런 일 때문에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모른다. 우시지마는 손을 뻗어 카게야마가 든 넥타이를 잡아 당겼다. 고급 소재라 그런지 넥타이는 부드럽게 카게야마의 손에서 흐르듯 빠져나왔고 카게야마는 살짝 고개를 들어 우시지마를 쳐다보았다.
"요즘 애들이란. 게을러 빠져서 다들 자동을 쓰니까 이러지."
우시지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카게야마는 그 자동 넥타이마저 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시지마는 그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익숙한 솜씨로 카게야마의 목에 넥타이를 둘렀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넥타이를 풀었다.
"이리 와."
우시지마가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카게야마의 팔을 잡아 거울 앞으로 끌어왔다. 방심하고 있던 터라 마치 어른에게 끌려가는 아이마냥 힘없이 끌려온 카게야마는 멀뚱히 서서 저와 우시지마가 비치고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천천히 자리를 옮겨 카게야마의 뒤에 섰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목에 넥타이를 걸친후 마치 뒤에서 끌어안는 것과 비슷한 자세로 그의 겨드랑이 밑에 팔을 끼워 넣었다.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크게 침을 삼켰다.
"거꾸로 매줘 봤자 이해 못할 거 같으니 이렇게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우시지마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넥타이를 매었다. 이렇게 고리를 만들고, 긴 쪽을 넣어서… 우시지마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카게야마는 그것에 하나도 집중할 수 없었다. 우시지마의 손가락은 남자답게 투박하고 굵은 편이었다. 섬세한 일과는 안 어울릴법한 그 손가락이 부드럽게 헤엄치며 매듭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우시지마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마치 문 밖의 세상과는 격리된 기분이 들었다. 우시지마의 손가락이 제 목덜미에서 춤추었고, 우시지마의 심장이 등 뒤에서 펄떡였으며, 그의 체온이 등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가 쓰는 향수의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마치 뭣도 모르고 독한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단숨에 들이켰던 어린 시절처럼 순식간에 전신에 열이 오르고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취할 것 같아.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우시지마의 품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집중 안했지, 카게야마."
그리고 돌아온 건 우시지마의 따끔한 목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번쩍 눈을 떴다. 어느새 넥타이는 완벽하게 매듭지어져 비뚤어진 곳 하나 없이 카게야마의 목에 걸려있었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여전히 카게야마의 등 뒤에 서서 그를 받치고 서있었다. 죄송합니다, 카게야마가 급히 중얼거리며 우시지마에게서 떨어졌다. 우시지마의 숨결이 머리카락을 타고 흩어진 것도 같았다.
"한 번 가르쳐 줬으니 두 번은 안 가르쳐 줘."
우시지마는 제 품에서 떨어지는 카게야마를 다시 붙잡아 품으로 눌렀다. 카게야마가 놀란 눈동자를 하자 거울 너머의 우시지마가 눈썹을 씰룩이곤 카게야마의 넥타이를 쥐었다. 여기, 거울로 보니까 살짝 비뚤어져서. 카게야마는 대체 어디가 비뚤어졌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우시지마는 몇 번 더 넥타이를 매만지고는 넥타이의 볼륨을 잘 살려 정리해 주고서야 카게야마를 놓아주었다. 카게야마는 얼떨떨한 얼굴로 후끈거리는 뺨에 손등을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말인데,"
우시지마가 덧붙였다. 카게야마는 살짝 벌어진 입을 채 닫지 못하고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저기요'가 아니야."
우시지마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확인하곤 우산을 뻗어 벽에 달린 고리에 우산의 손잡이를 걸었다. 그리고 가볍게 우산을 잡아당기자 벽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리가 딸깍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갔다. 곧 커다란 기계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우시지마 씨라고 불러."
카게야마는 여전히 몽롱한 정신을 바로 잡기 위해 천천히 돌아가는 눈앞의 거울에 시선을 맞췄다. 와카토시 씨도 괜찮고. 그러나 바로 혼잣말처럼 이어진 작은 목소리와 함께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얼굴에 아찔하게 열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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