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른 같은 주제로 글쓰기 4인합작에 제출한 글입니다.
주제 : 헤어졌던 연인의 재회
http://reunion-4-u.tistory.com/
카게야마는 슬슬 초조해졌다. 아무리 목을 길게 빼고 찾아봐도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사이로 유우키는 보이지 않았다. 깜빡 낮잠을 자는 바람에 평소에 유우키를 데리러 가는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어버리긴 했지만, 전부터 유우키에게 아빠가 혹시라도 늦으면 아무데도 가지 말고 교문 앞에 서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해놓았었기에 제멋대로 혼자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거나 하진 않았을 터였다. 아이들의 물결이 몇 차례 쏟아지고, 학교를 나서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수가 점점 줄어가는 데도 유우키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혀를 내어 입술을 핥으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수업을 마친지 삼십 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선 이미 오만가지 상상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경찰에 전화를 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카게야마는 휴대전화를 들어 유우키의 담임선생님의 번호를 찾는 걸로 대신했다. 그래, 반에서 갑자기 단체로 이벤트를 벌인다거나 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뒤쪽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하마터면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아빠!”
“유우! 대체 너 혼자 어디 갔,”
그리고 뒤를 돌아본 카게야마는 말을 미처 끝맺을 수 없었다.
“었어…….”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간신히 말을 마친 카게야마는 저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유우키와, 그의 다른 손을 잡고서 역시 함께 저를 보며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순간 시야가 아찔해졌다. 카게야마는 연신 입술을 핥으며 혹여 떨리는 손을 들킬까 싶어 재빠르게 입고 있던 야상의 주머니에 깊게 손을 찔러 넣었다.
“아빠! 아빠! 내가 누구랑 왔게!”
유우키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카게야마를 향해 소리를 치며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던 눈을 살짝 돌려 유우키에게 어색하게 웃어준 후 다시 남자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굳이 유우키가 저렇게 소리를 질러가며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쿠로쨩이야! 진짜 쿠로쨩이 왔어!”
유우키는 남자의 손을 잡아 끌며 카게야마에게로 뛰어와 카게야마의 옷자락을 잡고 반짝이는 눈으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어 저를 닮아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그런 유우키의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시선만큼은 여전히 남자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안녕, 아저씨.”
쿠로오 테츠로. 어떻게 그를 잊을 수 있을까.
유우키만 아니었어도 그를 집으로 들이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쿠로오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집에 들어섰다. 저 쿠로오 특유의 말투는 어째 마지막으로 봤던 몇 년 전과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유우키는 신이 난듯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곤 쿠로오의 옷자락을 잡고 제 방으로 데려가려 들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며 유우키의 다른 손을 붙들었다.
“유우. 신발 정리 해야지.”
“…….”
“빨리.”
카게야마의 엄한 목소리에 유우키는 결국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신발장으로 다가가 끝에서 끝으로 내던져진 신발들을 한 짝씩 손에 쥐고 가지런하게 정리해 내려놓았다.
“……식탁 앞에 앉아있어.”
그 모습을 보던 카게야마가 넌지시 쿠로오를 향해 말했다. 사실 쿠로오를 향해 말했다기 보다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한 탓에 혼잣말에 더 가까워보였지만 쿠로오는 알아서 알아들었는지 빙긋 웃으며 식탁이 놓인 부엌으로 향했다.
“나 이제 쿠로쨩이랑 놀아도 돼?”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익숙한 느낌에 카게야마는 뒤를 돌아보았다. 유우키의 머리 너머로 반듯하게 정리된 작은 신발 한 쌍이 보였다. 카게야마는 허리를 굽혀 유우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쿠로오 오빠가 아빠한테 할 말이 있대, 유우.”
사실상 ‘안 돼.’라는 말을 완곡하게 돌려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제대로 본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이제는 카게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똑똑히 알아들은 건지 유우키는 조금 전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새삼스럽게 유우키가 많이 자랐다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오리처럼 튀어나온 작은 입을 살짝 잡아 두어 번 흔들고 놓아주었다.
“아빠만 쿠로쨩이랑 놀려고 그러지? 유우는 빼놓고?”
“아빠는 쿠로오 오빠 안 좋아하는데? 당연히 유우를 더 좋아하지.”
“거짓말.”
별 것 아닌 아이의 투정이 어째선지 깊게 카게야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몇 년 전에 들었던 그의 목소리와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애써 웃으며 유우키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일어났다.
“금방 놀게 해줄게. 잠시만 방에서 혼자 놀고 있어, 알았지?”
유우키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보이곤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삐친 것이 분명한 표정이었다. 조금 이따가 쿠로오랑 놀면 금방 괜찮아지겠지.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곤한 얼굴로 부엌으로 걸어가 쿠로오의 앞에 앉았다. 쿠로오는 턱을 괴고서 부녀의 대화를 빤히 바라보다 제 앞으로 걸어와 앉는 카게야마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카게야마는 얼굴에 한 가득 껄끄러운 표정을 짓고서 쿠로오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래도록 마주보지는 못했다.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카게야마였다. 쿠로오는 여전히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유우키는 자라니까 아저씨랑 더 닮았네요.”
갑자기 들려온 쿠로오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어깨를 흠칫 떨며 다시 쿠로오를 쳐다보았다.
“누가 보면 아저씨 혼자 낳은 애인줄 알겠어.”
“……헛소리 하려고 찾아왔냐?”
카게야마는 미간을 찡그리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상한 소리들을 해대는 건 옛날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는 쿠로오 역시 카게야마의 반응에 옛날과 비교해 바뀐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짧은 웃음 끝에 웃음을 가라앉힌 쿠로오는 다시 입을 열었다.
“3년 만이에요.”
벌써 3년이나 지났던가. 카게야마는 초조하게 식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뚝 멈추었다.
처음에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묘하게 달랐다. 3년 전만 해도 고등학생이었던 그에게선 이제 스멀스멀 제대로 된 남자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그 때부터 이미 충분히 저보다 컸던 키는 조금 더 자라있었고, 아까는 겉옷을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집으로 들어와 겉옷을 벗고 검은색 터틀넥 하나만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군데군데 근육이 더 단단하게 붙은 것처럼 보였다. 운동부였던지라 고등학생 때도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몸이긴 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과거의 영상에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풍기는 분위기도 조금 달라져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지금보단 더 초조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었는데. 겉으로는 잔뜩 여유로운 척 굴긴 했지만 그래도 애라고 사실은 어쩔 줄 몰라하고 초조해하는 게 카게야마의 눈에는 전부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저를 보는 눈동자를 살펴봐도 그 눈에 비치는 제 얼굴 말고는 도무지 다른 것을 볼 수가 없었고, 슬쩍 올라간 입꼬리는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더욱 파악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풋내 나던 녀석이 어느새 어른 냄새를 풀풀 풍기며 3년 만에 제 앞에 나타났다. 카게야마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그가 다시 시작하자는 소리라도 하면 이제는 더 이상 너는 어리다는 비겁한 변명으로 도망칠 수 없다. 카게야마는 이제 온 집안에 떠도는 것만 같은 아찔한 냄새에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카게야마는 머뭇거리던 입술을 겨우 열어 물었다.
“제가 뭘 어떻게 알고 오겠어요. 볼일 있어서 왔다가 우연히 학교 앞에서 유우키를 만났을 뿐이죠.”
쿠로오는 턱을 괸 얼굴을 살짝 비스듬하게 옆으로 숙이며 대답했다. 쿠로오의 대답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머쓱하게 변해가자 쿠로오는 웃으며 다시 고개를 바로 세우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는 거짓말이고. 여기저기 열심히 알아봤어요. 아저씨 어디로 이사 갔는지.”
쿠로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가버리면 다인가.”
저를 책망하는 듯한 쿠로오의 말투에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제가 잘못한 것이 맞았다. 카게야마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던 열여덟의 쿠로오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마치 제 가슴 깊이 묻어놓은 죄책감의 근원을 다시금 긁어내어 물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나타난 것만 같았다. 쿠로오는 말이 없었다. 검게 물든 눈으로 빤히 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 위로, 제가 알던 눈동자를 겹쳐보았다. 그러자 마치 먼지가 가득 쌓인 열쇠 구멍에 맞는 열쇠를 끼워 맞춘 듯 묻어 놓았던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트립쇼 보는 것 같아.”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침대에 누운 쿠로오가 맨 몸에 이불 하나만을 덮은 차림으로 중얼거렸다. 나 지금 옷 입고 있는 중이거든? 카게야마가 빠르게 반박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바지를 주워 다리를 꿰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쿠로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 다음엔 아저씨한테 스트립쇼 해달라고 할래. 이어진 쿠로오의 말에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바지를 올려 입고 침대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셔츠를 주워 팔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쿠로오는 여전히 들뜬 얼굴로 물끄러미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저를 훑는 그 어린 시선을 느끼고 슬며시 뒤를 돌았다. 온몸으로 저를 좋아한다 말하는 사람에게, 직전까지도 몸을 섞었던 사람에게 곧장 이별을 고할 용기는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었어도 그건 힘든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가 나갔다.
“얼굴 보여줘요.”
등 뒤로 쿠로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카게야마는 대답을 하지도,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남색 니트를 주워 입기만 할 뿐이었다.
“쿠로오.”
깊게 한숨을 쉰 카게야마는 옷매무새를 완벽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천천히 그의 이름을 내뱉는 제 목소리가 어쩐지 이상하게만 들렸다.
“나 교토로 이사가.”
카게야마는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있던 쿠로오의 얼굴을 간신히 바라보았다. 싱글싱글 웃고 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보며 그 즉시 후회했지만.
“……언제요?”
쿠로오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카게야마는 목이 타는 것만 같았다. 버석하게 말라가는 입술을 혀를 내어 축였다.
“……내일.”
카게야마는 더 이상 쿠로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도쿄와 교토 사이의 거리는 쉽게 이사할만한 거리는 아니다. 그런 곳으로 이사를 가겠다 말하는데, 몇 달 전에 말하는 것도 아닌 바로 전 날에 말을 하니 쿠로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히 짐작이 갔다. 쿠로오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는지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게야마는 몸을 움찔 떨었다. 마지막 말은 그래도 눈을 보고 해주고 싶었다. 비겁하게 도망치는 주제에 웃기지도 않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을 잃은 얼굴이 말없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어지는 게 좋겠어.”
카게야마가 느리게 입을 떼었다.
“솔직히 너무했죠?”
갑자기 들려온 쿠로오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잠시 떠올렸던 과거의 기억을 재빠르게 놓아주었다.
“……뭐가.”
카게야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하지만 쿠로오는 아마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다. 제가 쿠로오의 여유로움 속 초조함을 제대로 꿰뚫었듯 쿠로오 역시 늘 제 속을 제대로 읽어내곤 했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슬쩍 비위를 맞춰주거나 지나가는 말로 툭 던져놓거나 하는 식이었다.
“아저씨 방금 옛날 생각 했잖아요.”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카게야마는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내밀 뿐 대답하진 않았다.
“차라리 거리가 머니까, 너도 나도 힘들 것 같으니까 헤어지자고 했으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긴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차피 그렇게 멀리 가버릴 생각이었으면 그러는 게 나았을 거예요.”
“…….”
“드라마도 아니고 대사가 그게 뭐야. 나 진짜 억울했다고요. 뭐라 항의할 새도 없이 그렇게 낼름 사라져버리고.”
쿠로오의 말투는 살짝 장난기가 어린 말투였지만 카게야마는 저 말 속에 담긴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상처 받았었구나. 쓴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몇 년 만에 만나 본인에게서 직접 들으니 더욱 죄책감이 가중되는 것이었다.
“멀리 이사하게 돼서 헤어지자고 하는 게 아냐.”
쿠로오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보여 카게야마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 입에서 제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전에, 저를 약하게 만들던 눈동자를 봐버리기 전에 빠르게 쐐기를 박는 것이 중요했다.
“……나 너 안 좋아해.”
솔직히 당치 않은 말이라는 걸 안다. 구식이란 것도 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쿠로오에 비하면 구시대의 사람이 맞았고, 이렇게 될 바엔 쿠로오가 저를 미워했으면 했고,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떠오르는 것이 저 말밖에 없었다. 쿠로오는 표정을 잃은 얼굴로 물끄러미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거짓말.”
카게야마가 몸을 움찔했다. 쿠로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눈을 피했다.
“……좋아한다 하더라도 넌 너무 어려. 아직 창창한 네가 나이도 많고 애까지 있는 남자한테 매여 사는 건 누구라도 욕할 거야.”
“…….”
“나는 가끔 유우한테 경멸스런 시선을 받는 꿈을 꿔. 꿈에서 그 아이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으로 나를 타박해. 나는 그게 무서워. 내 아이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아. 나는 이미 미래를 생각하기엔 늦었고, 남은 건 유우뿐이야. 나는 유우한테 최선을 다하고 싶어. 가뜩이나 엄마 없이 자랐다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아빠까지 욕먹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는 않아. 나는 유우에게 완벽한 아빠가 되어주고 싶어.”
내뱉는 구절구절이 어쩜 이렇게 초라할 수가 있을까. 카게야마는 제 서투른 말솜씨를 원망했다. 어떻게 들어도 이기적인 아저씨의 투정처럼 들렸다. 하긴, 그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저씨. 쿠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다시 쿠로오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저씨는 이미,”
“쿠로오.”
쿠로오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카게야마는 그것을 들을 용기가 없어 재빠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었다.
“나를 이해해줘.”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쿠로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제 입장만 요구했다는 사실에 비참함과 죄책감, 그리고 자기혐오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게 되더라도 똑같이 말했으리라는 걸 카게야마는 잘 알고 있었다. 쿠로오는 늘 불안해했었다. 원인은 카게야마의 불안감이었다. 아직까지 세상은 싱글파파에게 고운 눈길을 주지 않았고, 카게야마는 알게 모르게 늘 위축되어 있었다. 쿠로오를 만나 마음을 열기 까지도 한참이었다. 그나마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열어놓고 그에게 기댄 적도 없었다. 쿠로오는 그래서 늘 불안해했다. 카게야마가 홀로 쌓아둔 불안감이 언젠가 터져버릴 것을 불안해했다. 카게야마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수를 두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랑받을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됐다. 유우키에게만 제대로 된 아빠일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포기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쿠로오를 뒤로 하고 그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겠지. 카게야마가 그의 방문을 닫고, 현관으로 나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다시 현관문을 닫기 까지 집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닫힌 현관문을 뒤로 하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던 것처럼 그대로 자리에 무너져 주저앉았다.
“그 날 내가 하려다 만 말이 뭔 줄 알아요?”
카게야마는 가만히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비교적 앳되었던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러게, 뭐였을까.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로 일방적인 이별을 내었구나.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 혼자 생각하고 저 혼자 통보한 이별에서 쿠로오의 말은 단 하나도 듣지 않았다. 그는 말하려고 했지만 제가 들어주지 않았다. 이제는 그것을 들어줄 수 있겠지. 3년이나 지났는데 그 정도 용기쯤은 생기지 않았을까. 카게야마는 쿠로오에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저씨는 이미 완벽한 아빠라고요.”
쿠로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벼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은 전혀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세상의 눈들을 너무 신경 쓰진 말아요.”
쿠로오는 제가 앉았던 의자를 식탁 안으로 깊이 밀어 넣었다.
“유우키에게만 완벽하면 되잖아요.”
그리고는 의자에 걸쳐 두었던 겉옷을 입으며 말했다.
“아까 유우키에게 물어봤었어요.”
카게야마는 아마 지금 제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얼굴일 것이라 생각하며 멍하니 쿠로오의 얼굴을 따라 눈동자를 옮겼다. 쿠로오는 이제 식탁을 빙 둘러 나와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멋있고 제일 좋대요.”
이제 쿠로오는 현관에 벗어두었던 신발에 발을 꿰어 넣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양쪽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부딪쳐 정리한 쿠로오가 문을 향해 다가가서는 카게야마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는 살짝 벌어진 입술로 가만히 쿠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우키한테는 미안하다고 잘 좀 전해줘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쿠로오.”
쿠로오의 손이 문손잡이를 잡음과 동시에 카게야마가 서둘러 그를 불렀다. 쿠로오는 문을 열던 손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오늘 왜 왔어?”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작게 메아리쳤다. 쿠로오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빤히 카게야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요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마시고 내뱉었다. 3년이나 지났다. 슬슬 잊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그 이름도 잘 떠올리지 않게 된 시점이었다. 그 시점에서 그가 찾아왔다. 카게야마는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이제 마음 정리 다 했거든요.”
쿠로오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다시 몸을 돌리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열린 틈새로 새어 들어왔다.
“거짓말.”
그 목소리에 쿠로오가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말이었다. 3년 전에 제가 뱉었던 말. 익숙한 남자가 익숙한 얼굴로 익숙한 말을 뱉어냈다. 쿠로오는 멍하니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서툴게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문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 침묵만이 맴돌았다. 쿠로오는 저 카게야마 토비오를 잘 알았다. 저런 용기를 낼 사람이 아닌데. 제 곁에 있으면서도 제게 도움을 요청할 줄을 모르고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숨어 지내던 3년 전의 그를 떠올렸다. 당신도 달라졌구나. 쿠로오의 입가에 느리게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카게야마를 닮아있었다.
“카게야마 씨.”
카게야마의 눈이 살짝 동그랗게 뜨였다. 쿠로오가 저를 저렇게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엔 또 언제 올까요?”
쿠로오의 미소가 천천히 본연의 것으로 변해갔다. 카게야마는 그 웃음에서 3년 전의 그를 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무색할 만큼 심장이 뜨겁게 뛰어댔다. 카게야마는 코끝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일 유우네 학교 쉬니까,”
카게야마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유우랑 놀아주러 와.”
여전히 살짝 열린 문 사이로 계속해서 들어오던 찬바람이 조금 누그러졌다. 카게야마는 멎어가는 바람을 느끼며 약해진 바람에 실려온 쿠로오의 향기를 맡았다. 익숙한 향기였다. 유우를 재워놓고 저도 그와 함께 잠들 때면 늘 잠결에 코끝에 맴돌았던 그 향기.
쿠로오는 작아진 바람소리를 느끼며 바람이 사라진 공간에서 요동치는 심장의 소리를 들었다. 익숙한 고동이었다. 제 품에 안겨 잠들었던 그에게서, 제 가슴과 맞닿아있던 그의 가슴에서 느꼈던 심장 고동. 익숙한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떻게 잊고 지냈을까.
쿠로오는 조금 더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이제는 틈새로 바람이 아닌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카게야마는 눈을 강타하는 햇빛 속에서 눈을 감지 않았다. 햇빛을 등지고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쿠로오를 마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