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야마.”
대학 리그에서 꼬박꼬박 상위권을 차지하는 강호 대학교와 연습 시합이 한창이었다. 몇 번의 듀스가 이어진 끝에 마지막 세트를 아슬아슬하게 따내고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을 마시는 카게야마를 우시지마가 불렀다. 카게야마는 물 한 통을 한 번에 다 비울 기세로 물을 들이키다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물통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우시지마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기본적으로 제게 다정한 연인이었지만, 자기 주장이 강한 남자이기도 했다. 특히나 데이트가 아닌, 배구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지금 저 표정은 무언가 조금 전 플레이에서 불만이 있었던 표정인 게 틀림없었고, 카게야마는 대충 우시지마가 어느 포인트를 지적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배구 선수로서의 우시지마를 존경하고 존중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플레이에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었고, 저를 따라줄 것을 원했다. 원했다는 표현보다는 명령했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 같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카게야마는 우시지마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었다. 우시지마의 말이 맞는 것도 있었고, 그가 팀을 좌지우지하는 에이스이며 주장이었기에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순순히 따라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카게야마 역시 우시지마 못지않게 제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카게야마도 순순히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에 왜 그랬지.”
“뭐가요?”
카게야마는 태연한 얼굴로 우시지마를 올려다보며 땀을 닦았다. 우시지마는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닫고 카게야마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올리지 말고 왼쪽으로 올렸어야지.”
우시지마는 앞뒤 아무런 부연설명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시지마와 카게야마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부원들도 느낀 건지 다른 3학년 부원이 우시지마의 근처로 와서는 이겨놓고 왜 그러냐며 장난스레 핀잔을 주었지만 우시지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우시지마 역시 카게야마의 그런 버릇을 알고 있었다.
“우시지마 선배한테 올리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카게야마는 살짝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같았다면 저 정도로 ‘지금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는 뉘앙스가 풀풀 풍기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토스, 그리고 우시지마에 대한 신뢰를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우시지마는 아마 그저 그 상황에 걸맞은 최선의 판단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카게야마 역시 이론적으로는 우시지마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팀에 들어와 절대적인 신뢰라는 것을 배우며 이론과는 또 다른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카게야마는 그것을 믿었다.
“상대가 수를 읽었는데도?”
우시지마가 더욱 눈썹을 찌푸렸다.
“상대뿐만이 아니라 이 경기를 지켜보는 모두가 읽었을 텐데. 그리고 너 역시도 상대에게 읽혔다는 걸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설마 그것도 모르고서 내게 토스를 올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우시지마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이제는 뒷정리를 하던 모두가 이쪽을 흘낏거리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 인상을 쓴 얼굴로 묵묵히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내밀고 있던 입술을 더욱 삐죽거릴 뿐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시지마의 옆에 선 3학년이 이제는 아예 우시지마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만해, 잘 이겼잖아. 그가 그렇게 말하며 우시지마를 말리려 했지만 우시지마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이긴 거지. 마지막에 공을 친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네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졌을 거다. 연습시합이 아니라 전국에서 치르는 본 시합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대로 떨어져서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했겠지. 한 번의 판단 미스가 얼마나 큰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고 있나?”
“마지막 그곳에 우시지마 선배가 아니라 다른 선배가 있었다면 그 쪽으로 올리지 않았을 거예요.”
카게야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똑바로 우시지마를 바라보며 평소보다 조금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와 목소리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떨리고 있어 우시지마도, 그를 말리고 있던 3학년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알아요. 제가 올리려던 방향은 상대가 읽은 방향이었고, 그 경우엔 빠르게 방향을 틀어서 미끼였던 척 하는 게 좋다는 것쯤 왜 모르겠어요. 제가 토스를 올리려던 사람이 우시지마 선배가 아니었다면 저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카게야마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우시지마는 눈썹을 꿈틀 거릴 뿐이었다. 한껏 치켜 올라갔던 눈썹이 저도 모르는 새에 조금 누그러져있었다.
“우시지마 선배니까 올린 겁니다. 수를 읽혔더라도 우시지마 선배라면 충분히 블록을 뚫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가장 중요한 순간, 반드시 공격을 성공해야만 하는 순간, 그 순간에 제 토스를 받을 사람은 우시지마 선배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에이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그게 잘못됐나요? 언제, 어느 순간이라도 당연하게 득점을 해낼 수 있는 사람에게 올렸을 뿐입니다.”
카게야마는 잠시 말을 끊었다. 우시지마를 말리려던 3학년 부원도 제가 끼어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떨어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말없이 아까와 같은 자세로 카게야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만큼은 미묘하게 달라져있었다. 카게야마는 혀를 내어 입술을 한 번 훑고 몇 번 벙끗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선배한테 토스를 올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건네 온 질문에 우시지마는 몸을 흠칫 떨었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를 보고 있지 않고 있었다. 무조건적으로 저를 신뢰하라 말한 것은 우시지마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바보같이 흥분해서 홧김에 상처가 될 말까지 하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카게야마. 우시지마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이 팀에 카게야마가 들어왔을 때, 그는 신뢰에 대해 알지 못하는 어린 독재자였을 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저와 교제를 시작해나가며 그럭저럭 신뢰를 배우고 제게 맞춰나가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크게 자라있을 줄은 몰랐다. 판단을 잘못한 것은 카게야마가 아니라 우시지마 자신이었다. 카게야마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생각보다 많이 자라있었고, 그 바탕엔 어느새 훌쩍 커져버린 신뢰라는 것이 있었다. 우시지마는 살짝 한숨을 내뱉었다. 카게야마.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카게야마는 더욱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우시지마는 팔을 뻗어 카게야마의 등을 감쌌다. 그리고 힘을 주어 제 품 안으로 세게 끌어안았다. 카게야마의 몸이 크게 펄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우시지마를 밀어내려 했으나 카게야마의 힘에 밀릴 우시지마가 아니었다. 우시지마는 품에 가득 카게야마를 끌어안고서 그의 귓가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답이 없었다. 흠칫 흠칫 몸을 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도 강하지만 네가 올려준 토스가 있었기에 몇 배로 강할 수 있어.”
카게야마가 살짝 고개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나를 신뢰해줘서 기쁘다.”
우시지마는 그렇게 속삭이며 카게야마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카게야마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품 안에서 몇 번 몸을 꿈틀대더니 팔을 뻗어 우시지마의 허리에 살짝 얹었다.
“……내가 선배를 믿는 만큼 선배도 나를 믿어줘요.”
카게야마가 중얼거렸다. 우시지마는 그것에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카게야마의 귓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것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크게 들려온 입맞춤 소리에 우시지마의 허리에 살짝 얹어두었던 팔에 꼬옥 힘을 주었다. 시합이 끝난 직후라 뜨거운 체온이 적나라하게 와 닿았고, 평소보다 더욱 진한 체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한편, 저 멀리서는 다른 부원들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런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