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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른] 조각글 모음 (141029~141224)
시라카게는 시라부 이름이 나오기 전에 적었던 글입니다.. 그래서 글에 이름이 없어요 ^^;
트위터, 트윗숏으로 짧게 적어내려간 단문들 백업입니다.
141029 우는 츠키시마가 보고 싶었다
건널목에서 차단기가 올라가길 기다리며 이어폰을 꽂고서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리던 찰나, 나는 길 건너에서 무언가 익숙치 않은 것을 스치듯 본 기분이 들어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분명,
둥그렇고 검은 머리를 가진 이가 서있었다.
나는 제대로 그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급하게 고개를 빼어보았으나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기차가 들어왔다. 나는 계속해서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이리저리로 움직이며 건너편을 확인하려 애썼다. 기차의 창문들 너머로 언뜻언뜻 검은 머리가 보였다가도, 사라졌다가도 했다. 카게야마! 필사적으로 그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한없이 부족한 목소리는 기차의 괴성에 파묻혀 입 밖으로 튀어나옴과 동시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초조하게 기차가 전부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서서히 기차의 꼬리가 드러날 무렵, 나는 차단기가 올라가기도 전에 철도 위로 올라섰다. 기차의 끝 칸이 전부 빠져나가고 시야가 훤해졌을 때, 나는 결국 철도의 중간 쯤에서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건너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아, 그랬지.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들이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 머릿속을 이리저리 범람했다. 그 거대한 기억의 물결에 나는 더 버틸 수가 없어져 그대로 철도의 한가운데에 고개를 숙이고 주저 앉았다. 안경 위로 눈물 방울이 떨어져 시야가 어지러웠다. 멀리서 관리인이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애초에 너는 건너편에 있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왜 이곳에서 너의 잔상이 보인 건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너의 마지막 풍경을 보러왔던 것일까?
너는 오 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철로 이탈 사고의 피해자였다. 나는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인생을 버려두고 너의 잔상에 갇혀 괴로워했다.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여 차츰차츰 너를 내 안의 깊은 곳에 밀폐하려 애썼고, 삼 년 째 되던 해에 너의 죽음을 완전히 지우는데 성공했다. 그 해 이후로 나는 종종 이곳을 지나쳤고, 그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에 싸여 빠르게 길을 건너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 결국, 네가.
잊지 말아달라고 나타난 것일까, 혹은 내 안이 답답하여 달아나고 싶었던 것일까, 너의 마지막 풍경이 그리웠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그리웠을까.
이제는 눈물로 범벅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안경을 벗어 접어 주머니에 쑤셔넣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봐요, 여기서 이러시면 위험해요. 관리인이 내 어깨를 붙들어 일으키려 들었다. 잠시만요.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엉망이 된 목소리를 뱉어냈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잠시만…
나는 하염없이 의미없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한숨과 함께 제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잠시만, 잠시…
결국 그 목소리마저도 울음에 먹혀들어갔다.
141109 카게야마 in 시라토리자와
"잠 설쳤어?"
"아… 티 나요?"
움푹 패인 눈 밑을 손으로 꾹꾹 누르던 카게야마는 그대로 손을 올려 눈을 비비고 살짝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크게 휘청이는 몸에 우시지마는 머리의 물기를 털고 있던 수건을 내던지고 급하게 카게야마 쪽으로 달려가 쓰러지는 카게야마를 간신히 받쳐 안았다. 덕분에 카게야마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 치는 일은 면했지만, 급히 달려가느라 우시지마 역시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한 터라 그대로 라커에 부딪치는 바람에 요란한 소리가 라커룸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별 일 아니니까 다들 볼일 봐.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향한 것을 본 우시지마가 한 마디 던지자 부원들은 언제 쳐다봤냐는 듯 다시 저들끼리 수다를 떨며 옷을 갈아입기 바빴다.
"뭐하느라 잠을 못 잤길래 이 지경이야?"
"죄송합니다."
"혼내려는 게 아니라,"
우시지마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작게 한숨을 뱉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걱정돼서 그런거다."
"…아까는 균형을 잃은 것 뿐이라,"
카게야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시지마는 나름대로 엄한 얼굴을 하고서 카게야마를 내려다 보았다. 늘 자연스럽게 윤기가 흐르던 카게야마의 얼굴이 어쩐지 푸석푸석하게 보였다. 우시지마는 손을 들어 살짝 카게야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역시, 그렇게 보인 것이 착각은 아니었는지 언제나 부드러웠던 볼이 꺼끌꺼끌하게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어쩔줄 모르는 얼굴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 조심스레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 눈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우시지마를 올려다 보았다.
"…경기 영상들을 좀 보느라 그랬어요."
"영상?"
"네…. 1학년 주제에 정세터가 됐다고 저 욕 많이 먹는 거 알아요. 저만 욕 먹으면 상관 없는데, 괜히 우시지마 선배까지 들먹이니까 그렇다면 실력으로 승부해야겠다 싶어서…."
카게야마는 말끝을 흐리며 함께 고개도 숙였다. 우시지마는 그 덕에 드러난 까맣고 둥근 카게야마의 머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갑자기 느껴지는 손길에 카게야마는 놀란 눈으로 다시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썩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히 무서워진 카게야마가 또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 우시지마가 머리를 만지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카게야마의 턱을 쥐고 저를 바라보게 했다.
"나를 욕하는 자들은 전부 내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 뿐이다."
"……."
"그건 너한테도 마찬가지고."
"……."
"나는 내 안목을 믿는다. 그러니까 당당해져라, 카게야마."
우시지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어쩐지 조금 감동받은 듯한 눈빛으로 우시지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시지마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며 얼굴에 띠고 있던 험상궂은 표정을 자연스레 풀고서 가벼운 한숨을 쉬며 뒷말을 덧붙였다.
"걱정할 만한 일도 좀 하지 말고."
카게야마가 또 다시 우시지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아까보다 조금 세게 몇 번 쓰다듬고는 곧 주위를 휘휘 살피다 몸을 낮추었다. 하실 말 있으세요? 그렇게 말하려던 카게야마의 말은 순식간에 제 볼에 입술을 붙여오는 우시지마의 행동 탓에 결국 목구멍 너머로 삼켜지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제 얼굴을 느끼며 침이나 음식물 같은 것이 아니라, 말 만으로도 사레에 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시지마는 붉어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해대는 카게야마를 보며 카게야마 모르게 즐거운 얼굴로 제 라커로 향했다.
141201
"우시지마 선배에게 신뢰받는 법을 알려달라고?"
나는 배구공을 들고 선 후배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결연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라이벌로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건가? 이 가증스러운 천재가 같은 포지션을 두고 다투는 내게 무슨 의도로 묻는 건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고작 그것 하나를 못해서야 아무리 천재라 하여도 결코 이 학교의 코트 위에는 서지 못할 것이다.
"내가 왜?"
그 짧은 대답에 불쌍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이 볼만 했다.
"…선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이어진 의외의 대답에 결국 일그러진 얼굴은 내 것이었다.
141201 시라토리자와 세터 2학년 설정
저 혼자만 아무것도 모르는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나와 아카아시를 번갈아가며 바라볼 뿐이었다.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없지. 나는 조금 짜증스럽게 카게야마를 쳐다봤다가 그마저도 귀엽게 보여서 그냥 관두었다. 그래도 그 눈치 없는 녀석마저 이 기류가 심상치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는지 조용히 빨대로 아이스티만 쪽쪽 빨아먹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미야기엔 왜 왔어?"
짜증을 감추지 못한 내가 신경질적으로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아시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 저 얼굴 진짜 재수없어.
"이번에 우리랑 카라스노랑 합숙 연습 하거든. 얘기 못 들었어?"
"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문한 내가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를 바라보자 카게야마는 찔리는 게 있긴 있는 듯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아니, 같은 현에 있는 강호교를 두고 뭐하러 도쿄에 있는 애들을 불러?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건 아니겠지만, 아카아시와 카게야마가 어쨌든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잘 걸 생각하니 도저히 끓어오른 감정이 식질 않았다. 나는 그 차오르는 감정들을 억지로 꾸역꾸역 깊이 눌러 식히며 차가운 한숨을 뱉었다. 내 표정이 어떤지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상당히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슬쩍 곁눈질로 나를 보았다가 흠칫 놀래는 듯 싶더니 다시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141202 약간의 오이카게 우시카게 포함
카게야마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오이카와 선배를 이기고 싶어요.
오이카와 토오루. 나는 그와 코트에서 종종 맞붙은 적이 있었고, 언제나 승자는 나였다. 정확히는 우시지마 선배였고 그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카게야마는 늘 코트 위에 올라서서 제가 올린 토스로 오이카와를 이기고 싶다는 열망을 온 몸으로 표출했다. 나는 어쩐지 그것에 빈정이 상했다. 오이카와를 이기기 전에 나부터 이겨야 코트 위에 설 수 있을 텐데, 이 단순한 후배의 안에 나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나는 시라토리자와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기본에 충실해 안정적이고, 에이스에게 충성스러운 세터. 그 정도가 딱 내 평가였다. 그러나 이제 막 들어온 카게야마에게 내려지는 평가는 달랐다.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나는 신경도 쓰지 않던 오이카와 토오루도, 심지어는 우시지마 선배 마저도. 카게야마 토비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 몸으로 오이카와 토오루를 이기고 싶다 열망하면서도, 어서 우시지마 선배에게 신뢰를 받아 코트에 서고 싶다 하면서도, 나를 이기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주목받고, 주목하는 자들 사이에서 나는 없었다. 그것이 빈정 상했다.
결국 그의 시선이 오이카와 토오루의 손 끝에 맞춰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된 날, 나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카게야마는 놀란 눈으로, 마치 내가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듯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붉은 감정이 넘실댔다. 그 열망이 내게도 허락됐으면 했다. ……선배?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그를 끌어당겨 그 입술에 나를 묻고 깨물었다. 튿어진 입술에서 아픈 열망이 흘렀다. 뜨겁고도 달콤한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게로 향하는 시선들. 나를 인지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나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꽤 강한 오르가즘을 불러 일으켰다. 오이카와 토오루도, 우시지마 선배도 나를 주시하고 경계한다. 아, 나는 그 쾌감 속에서 환희의 비명을 지르며 몸을 덜덜 떨었다. 혀에 닿는 열망이 달았다.
141203
"우시지마 선배는 뭘 좋아하세요?"
카게야마 토비오가 배구가 아닌 다른 것을 내게 물어온 건 처음이었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약간 어깨를 움츠리는 듯했지만 그래도 맑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선배가 제일 친하시니까…."
카게야마는 뒷말을 흘리며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았다. 어쩐지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렛을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듯한 느낌이라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이에게는 잘 관심을 두지 않는 카게야마가 우시지마 선배의 사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쎄하기도 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는 마음을 느끼며 최대한 태연한 척 카게야마에게 대답했다.
"딱히 없는데. 커피우유 정도?"
나는 카게야마에게서 시선을 뗀 채로 대답했고, 카게야마는 그것에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꾸벅 인사를 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크게 인사를 한 카게야마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왠지 가벼워보였다. 가볍고, 당당하고, 설렘마저 가득해보이던 그 뒷모습에 나는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감추려 빠르게 복도를 벗어났다.
그리고 며칠 뒤,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간 교사의 뒷편에서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우시지마에게 커피우유와 흰 편지봉투를 주는 카게야마를 보았을 때,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듯 교실로 달려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가슴이 이상했다.
나는 결국 분리수거를 하지 못했다. 그 후로 분리수거장에 갈 때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그 붉어진 얼굴이, 그답지 않게 수줍다는 듯한 표정을 띠고 있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41208 ntr 최강자들끼리 붙으면 누가 이길까
"잠깐, 카게야마."
카게야마의 공부를 봐주러 만났건만 어째선지 저 부엉이 녀석이 함께 자리한 것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합석하는 꼴이 짜증이 나 나는 최대한 아카아시 케이지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두 눈에 오롯이 카게야마만을 담고 카게야마의 책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카게야마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튼 내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나름대로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그렇게 무난한 시간이 흐르나 싶더니 잠자코 독서를 하고 있던 아카아시가 문득 카게야마를 부른 것이었다. 나도, 카게야마도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카아시를 바라 보았다. 아카아시의 시야 안에 나는 없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본 것은 안중에도 없는지, 제게로 눈길을 돌린 카게야마만 바라 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 모양새를 지켜 보았다.
"먼지가 묻었어."
아카아시는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동그란 머리로 가져갔다. 카게야마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며 몸을 낮추었다. 그 덕에 동글동글한 뒤통수가 한 눈에 드러났다. 쓰다듬고 싶어. 치밀어 오른 그 욕망을 미처 가라 앉히기도 전에 아카아시가 먼저 카게야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카아시를 바라 보았다. 아카아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미소가 스쳤다. 아, 재수 없어.
"다 됐나요?"
카게야마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살짝 치켜 뜨고 물었다. 아카아시는 다시 한 번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카게야마는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다리를 꼬고 앉아 그런 카게야마를 지켜 보았다. 속이 끓었다. 일부러 아카아시 쪽에는 절대로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특유의 짜증나는 미소를 한껏 담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을 것이 뻔했다. 카게야마는 어서 다음 진도를 알려달라는 듯 연필을 쥐고 내게 눈길을 보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속이 뜨겁게 끓었다.
"잠깐, 카게야마."
나는 좀 전에 아카아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으며 카게야마 쪽으로 몸을 가까이 했다. 네? 카게야마가 반문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천천히 카게야마의 입가로 가져갔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내 손을 따라 도르륵 굴러오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아마 아카아시 케이지의 시선 역시 나를 향해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끓던 속이 순식간에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뭐가 묻었어."
"아… 됐나요?"
아니, 아직. 나는 계속해서 카게야마의 입가를,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카게야마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지 뭐라 말도 못하고 눈동자만 갈 곳 없이 굴리며 얼른 내가 몸을 일으키기만을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지. 그것이 지금의 나로서는 좋긴 했지만, 나에게만 그러리라는 법도 없었기에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졌다. 그래도 일단은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뜨거운 데에 속이 개운해졌다. 나는 피어나는 미소를 애써 숨기며 그렇게 몇 번을 더 카게야마의 입가를 만지작거리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감사합니다! 멍하니 있던 카게야마가 뒤늦게 인사를 해왔다. 나는 카게야마가 고개를 숙여 다시 책을 보는 것을 지켜 보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타오르는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넌 아직 멀었다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얇게 웃어 보였다.
141209 약간의 오이카게 포함
"아카아시 씨랑 사귄다며?"
내 물음에 카게야마는 들던 잔을 다시 내려 놓았다.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에 머쓱함과 수줍은 것들이 잔뜩 어려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기 보다는 부끄러운 감정이 더 큰 듯했다. 나는 그것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오이카와 선배부터 시작해서,"
배배꼬인 마음이 그대로 목소리가 되어 입을 가르고 튀어 나왔다. 오이카와. 그 이름이 내 입에서 뱉어지는 순간 카게야마의 표정이 조금 굳은 것도 같았다.
"아카아시 씨까지. 일부러 세터만 골라 사귀는 거야?"
카게야마는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더더욱 불쾌해졌다. 괜히 삐딱한 건 난데, 왜 네가 죄 지은 것처럼 굴어.
"…그런 건 아닌데,"
"그래서 나는 안되는 거야?"
"……."
"세터가 아니라서?"
내 말에 카게야마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는 차마 씁쓸한 웃음조차도 짓질 못했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뚜렷하게 나를 향했다. 비참해졌다. 저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을 나는 안다. 놀람과 본능적인 동정. 나는 그 동정 앞에서 밀려오는 수치스러움에 그대로 손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141212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기형도)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겨울은 추웠고, 서글펐다. 아마도 나 혼자였으면 이 겨울의 끝을 보지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내 옆을 묵묵히 걷고 있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붉어진 코끝을 하고서 코를 훌쩍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듯 스쳤다. 얼어붙은 손을 녹이려는지 입가에 가져가 호호 바람을 불기도 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차가운 내 손이 차가운 그의 손에 닿았다. 그 감촉에 놀랐는지 카게야마가 동그란 눈을 하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말없이 그 손을 붙잡아 내 코트 주머니에 우겨 넣었다. 오이카와 선배?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말에 왜 이렇게 많은 소리들이 들려오는 건지.
춥잖아.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괜히 시선을 돌리고 코를 훌쩍였다. 바람이 닿는 부분들이 아려왔다. 나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대충 코트의 깃을 올려 세웠다. 꽁꽁 얼어붙었던 손이 서서히 따뜻해져 갔다.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뜻하게 만든다. 그랬기에 우리는 이 춥고 서글픈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갈 수 있었다. 그대로 얼어붙은 덩어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붙잡고 걸었다. 그렇게 걸었다.
아. 갑작스레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 역시 나를 따라 발을 멈추고 다른 손을 뻗어 내리는 눈을 조심스레 받아 보았다. 함박눈이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눈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네. 그리고 침묵. 이런 형태의 함박눈이 내린다는 것은 곧 날이 따뜻해질 것을 뜻했다. 나는 카게야마의 손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잡았다.
겨울의 통로가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이 통로의 끝, 그 다음을 나는 모른다. 카게야마 역시 모를 것이다. 그러나 무어가 됐든 우리가 함께일 것이라는 건 안다. 이 겨울보다 더 춥고 서글픈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도 우리는 지금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 묵묵히 걸어나가 다시 한 번 통로의 끝을 찾을 것이다. 따뜻한 봄이 우리를 반길 때까지. 마침내 봄을 찾으면, 우리는 이제 서로를 끌어안고 그대로 따스한 동산에 몸을 누이리라. 향긋한 꽃향기에 몸을 파묻고 사랑하는 너를 안고서 마침내 참고 눌러왔던 말을 조심스레 속삭이리라.
좋아해, 카게야마.
141214 #멘션으로_키워드세개주시면_140썰로_돌려드립니다
1. 이와카게 / 술주정, 오이카와, 이불
그래도 술주정은 없어서 다행이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며 카게야마가 걷어 찬 이불을 들어 가슴께까지 올려주려 했다. 그의 입에서 그 한 마디가 나오기 전 까지는. "오이카와 선배…" 이와이즈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카게야마를 내려다 보았다.
2. 오이카게 / 손전등, 불꽃, 종이
카게야마는 불꽃이 일렁이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있던 종이는 삽시간에 재가 되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불꽃이 꺼지고 찾아온 어둠에 카게야마는 손전등을 켰다. 비밀이야, 알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손목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3. 츠키카게 / 장갑, 손난로, 편지
츠키시마는 닫으려던 라커의 문을 다시 열어보았다. 낯선 선물상자가 놓여있었다. 뭐지? 상자를 열자 곱게 포장된 장갑과 손난로, 그리고 편지가 들어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다, 임마.' 발신인은 안 봐도 뻔했다. 츠키시마는 웃으며 상자를 닫았다.
4. 쿠로카게 / 와인잔, 벌꿀, 로사리오
흡사 피를 닮은 붉은 와인이 가득 찬 와인잔이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도, 벌꿀 칩이 오도독 씹히는 소리도 생생했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은 채로 침착하게 손목에 걸린 로사리오를 매만졌다. 그래봤자 소용 없어, 신부님. 카게야마는 질끈 눈을 감았다.
141224
나는 늘 앉아 커피를 마시는 2층 창가의 테이블에서 수시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미뤄뒀던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창 밖의 세상은 이제 순백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나는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내려보았다. 슬슬 올 시간이 됐는데. 세상을 수놓던 굵은 함박눈은 이제 거센 바람을 동반한 눈보라로 변해 있었다. 우산도 없이, 괜찮으려나. 나는 읽던 책을 테이블 위에 엎어놓고 커피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꿰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기 있네. 새하얀 세상 사이에서 저 멀리 빨간 목도리가 나풀거렸다. 점점 집으로 가까워져 오는 그 형체는 사람보다는 눈사람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카게야마는 움츠렸던 몸을 펴고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추위에 일그러져있던 얼굴이 환히 펴지더니 곧 나를 향해 붕붕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빨리 들어와.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카게야마는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몸을 움츠리고 뛰기 시작했다. 나는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1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닫혔다. 나는 아까 전 커피를 타느라 끓여두었던, 이제는 적당히 식었을 물을 컵에 붓고 핫초코 통을 꺼내 달큰한 냄새가 나는 가루를 큼지막하게 퍼서 컵에 담았다.
"으, 추워 죽는 줄 알았네."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티스푼으로 따뜻한 물과 가루를 휘휘 저어 섞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게야마가 코끝이며 볼이며 바람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털모자를 벗고 있었다.
"춥겠다. 이리 와."
카게야마는 내 말에 잠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하마터면 놓칠 뻔한 컵을 바로 들고, 내 가슴께에 코를 묻고 있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해져오는 한기에 내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카게야마에게선 겨울 냄새가 가득 묻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차가운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추고 컵을 들지 않은 손으로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아, 따뜻해. 카게야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카게야마를 안은 채로 조심 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카게야마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고 내게 꼬옥 매달려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귀여워 나는 웃으며 소파에 개어 놓은 담요를 들어 카게야마의 등을 덮어주었다.
"아카아시 씨한테서 커피 향이 나요."
카게야마는 웅얼거리며 더욱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는 웃으며 카게야마의 볼에 컵을 대었다. 차가운 볼에 갑자기 온기가 닿자 놀랐는지 카게야마가 흠칫 몸을 떨었다.
"너한테서는 겨울 냄새가 나."
이제 마실래? 카게야마는 내 말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 때문인지, 속눈썹 끝에 물방울이 대롱대롱 맺혀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다시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다가요. 그 말에 나는 결국 식탁 위에 컵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카게야마의 뺨을 감싸쥔 후 차가운 코 끝에 살짝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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