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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캐러+카키쿠] 12월 22일의 밤

팥_ 2014. 12. 22. 22:57



HAPPY BIRTHDAY TO KAGEYAMA TOBIO





  카게야마는 침대에 누워 어제와는 다르게 많이 화려해진 자신의 책상을 돌아보았다. 책상 위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페인트를 이용해 손으로 직접 ‘카게야마 토비오 생일 축하해!!!’라고 쓴 현수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글씨가 동글동글 예쁜 것이 아마도 야치가 적은 것일 듯했다. 그리고 구석구석 적힌 각종 낙서들. 부원들 전부가 모여 적었는지 적힌 장소도, 각도도 전부 제각기였다. 일단은 ‘생일 축하해.’라는 말이 빠짐없이 들어있는 듯했지만 중간 중간 생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족들도 많이 적혀있었다. 예를 들면, ‘새해에는 공부 좀 해, 왕님.’ 이라든가 —백퍼센트 츠키시마겠지.— 혹은 ‘생일이니까 놀려도 안 때리겠지? 카게야마 바보멍청이’ 라거나 —이건 히나타고.— ‘한 살 더 먹고 멋진 사나이가 돼라, 카게야마!’ 같은 —니시노야 선배다.— 겉으로는 익명이지만 실명이나 다름없는 낙서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책상에 정신없이 널린 각종 선물들이었다. 부원들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선물을 준 것도 모자라 마지막으로 스가와라가 한 아름 안겨준 선물들이었다. 그 선물의 양에 놀란 카게야마가 ‘무슨 선물이 이렇게 많아요?’ 하고 묻자 스가와라의 대답은 이랬다. 


  다른 학교 애들이 준 거야.

  히나타가 코즈메에게 카게야마의 생일임을 알린 것이 시작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책상엔 코즈메가 보낸 게임팩과 —게임기가 없는 게 문제지만— 덩달아 쿠로오가 보낸 웬 헐벗은 금발의 미녀가 표지를 장식한 잡지와 —배구 잡지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리에프가 보낸 정체모를 사자 인형 —귀여운 인형이 아니라 거의 실제 사자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같은 것들이 쌓여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쿠로오가 연락이라도 한 건지, 후쿠로우다니의 보쿠토와 아카아시에게도 선물이 와있었다. 보쿠토가 보낸 레그슬리브와 —안 그래도 한 번 착용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아카아시가 보낸 ‘세터를 위한 101가지 교습서’라는 책 —새로 나온 책인지 세터에 관한 책이라면 전부 사 모았던 카게야마 마저도 처음 보는 책이었다. 굉장히 신난 얼굴이었다.— 까지. 사실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히나타나 츠키시마라면 모를까, 저와는 합숙 내내 그다지 이야기도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신경을 써서 챙겨줬다는 점이 고맙고 어쩐지 벅차올랐다. 지금 자신이 굉장히 여고생스러운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아무튼 행복했고, 즐거웠다.

  작년 생일에는 어땠던가. 카게야마는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오이카와의 사진과 —오이카와가 선물이라며 억지로 주었다.— 이와이즈미가 준 염좌 예방에 좋다는 서포터를 —적을 도와주면 어떡하냐며 오이카와가 투정부리다 결국 맞았다.— 보며 생각했다. 이런 선물이라곤 기대도 못했었는데. 배구부는 이미 은퇴한 상태였고, 물론 은퇴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해도 누가 선물을 주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딱히 선물을 바라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생일인 걸 아무도 모른다는 양 구는 것 역시 바라지도 않았다. 차라리 정말로 아무도 몰랐다면 나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는 게 문제였다. 오죽하면 ‘못생긴데다 성격까지 고약한 토비오쨩, 생일 축하해줄까 말까?’ 하고 도착한 오이카와의 메일이 감동적이기까지 했을까.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올해는 달랐으니까.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혹은 그의 동생인 히나타 나츠의— 카게야마를 그린 그림과, 어딘가 엉성한 츠키시마의 소설책, 야마구치의 에어 파스, 야치의 손수 만든 케이크, 니시노야의 ‘축 생일’ 문구가 써진 티셔츠, 타나카가 직접 부탁해서 제작했다는 특대형 멜론빵, 엔노시타의 영어 단어장, 아즈마네의 헤어밴드, —집에서 혼자 써봤지만 아무래도 착용하고 경기에 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사와무라가 몇 다리 건너 인맥이 있다며 받아온 카게야마가 좋아하던 실업팀 선수의 사인볼, 스가와라가 근육 테이프 다 쓴 걸 봤다며 준 테이프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곱씹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밤이 길어도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토비오, 밖에 친구들 왔더라.”


  카게야마는 방문을 열고 나타난 어머니의 얼굴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친구들? 이미 밤이 깊을 대로 깊은 시간이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고스란히 떠올랐는지 어머니는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중학교 때 애들이던데? 


  카게야마는 더욱 기묘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대충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엔 정말로, 쿠니미와 킨다이치가 서있었다. 카게야마는 놀란 얼굴로 멍하니 둘을 바라보느라 인사할 타이밍을 놓쳤고, 킨다이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올렸다 내렸다 부산스럽게 난리였고, 쿠니미는 그런 킨다이치를 흘낏거리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 왜! 킨다이치가 작게 —그러나 다 들리게— 속삭였다. 목소리 커, 멍청아. 쿠니미가 핀잔을 주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쿠니미였다.


  “안녕, 카게야마.”


  쿠니미는 킨다이치의 손에 들린 케이크를 뺏어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카게야마는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별건 아니지만 생일 축하해.”


  쿠니미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색색의 포장지로 잘 포장된 물건을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그러자 킨다이치도 허둥대며 쿠니미를 따라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가득 찬 손으로 멍하니 쿠니미와 킨다이치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킨다이치는 멋쩍은 얼굴로 제대로 카게야마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고, 쿠니미는 그런 킨다이치의 옷자락을 잡아 끌며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쿠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결국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딱히 널 싫어하거나 하는 건 아니야.”

  “…….”

  “물론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작년에는 솔직히 진짜 싫어했는데, 그것도 다 일 년 지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 너도 알다시피 우리도 너도 꽤 변했고. 너나 킨다이치는 찝찝해도 참고 흘러 넘기는 성격이겠지만 나는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중학교 동창으로서 생일 정도는 축하해줄 수 있는 거잖아?”


  그렇게 말한 쿠니미는 킨다이치의 옆구리를 다시 한 번 찔렀다.


  “어, 어, 맞아. 그렇지.”

  “이제 와서 사과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작년에 유치하게 굴긴 했으니까.”

  “뭐… 그 때는 아무튼 진짜 짜증났지.”

  “킨다이치.”


  쿠니미가 킨다이치를 쳐다보았다. 어, 미안. 킨다이치가 머리를 긁으며 우물거렸다.


  “어…… 고마워.”


  카게야마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짧은 감사의 말을 뱉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오이카와가 ‘다른 애들은 나중에 직접 준대.’라는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다른 애들이라는 게 이 둘인가 싶었다. 카게야마는 우두커니 손에 들린 선물과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들이 가슴 밑바닥에서 꾸물거렸다. 그것은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다. 한 꺼풀, 저를 둘러싸고 있던 뻣뻣한 거죽이 벗겨지는 것 같기도 했고 코끝이 이상하게 간질거리기도 했다.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이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라기보다는 거의 쿠니미의 일방적인 타박에 가까웠다. 너는 여기까지 와서 제대로 된 말도 못해? 아, 네가 다 해놓고 내가 무슨 말을 더 해. 먼저 오자고 한 건 너였잖아. …조용히 해. 이러고 집에 가면 또 이불 뒤집어쓰고 끙끙거릴,


  “저기,”


  단조로운 어조로 신랄하게 킨다이치를 타박하던 쿠니미의 말이 멈췄다. 쿠니미의 시선도, 킨다이치의 시선도 모두 카게야마를 향했다. 카게야마는 갑작스레 쏟아진 정적에 민망한 듯 괜히 흠흠 잔기침을 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 괜찮으면 들어왔다 갈래?”

  “…….”

  “…….”


  괜히 말했나.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긴 시간이 많이 늦긴 했,”

  “나는 괜찮은데. 킨다이치, 너도 괜찮지?”

  “어? 어, 어, 뭐, 어차피 집도 가까우니까…”


  카게야마는 멋쩍게 웃으며 한 발짝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쿠니미가 뒤이어 발을 내딛었고, 킨다이치 역시 쿠니미를 따라 발을 옮겼다.


  아, 오이카와 선배랑 이와이즈미 선배가 준 선물도 있어.

  뭐 주셨는데?

  오이카와 선배는… 자기 사진.

  ……그 사람답네.

  이, 흠, 이와이즈미 선배는? 

  염좌 예방에 좋은 서포터.

  ……역시 멋져.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 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